SOUL TRAIN/SOUL TRAIN

꽃길따라 봄나들이 남도답사

오체투지해무 2009. 4. 24. 07:41

갑작스럽게 짐을 꾸려 남도로 봄여행을 떠났다.

이박삼일 느긋한 여정으로 발길 닿는 곳에서 쉬어가고, 머리 뉘이는 곳이 잠자리인 그런 편한 여행.

전라도 여행길이니 음식 걱정없이 스토브와 코펠 정도만 준비해가지만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고속도로로 나선 길이 어느덧 광주 땅을 지나니 서울보다 계절이 반쯤 앞서 나간다.

순천나들목을 지날 무렵 바람결에는 매화향이 가득하다.

 

순천에 드라마촬영장 사진이 인터넷에 자주 올라오기에 찾아봤다.

드라마"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 영화 "님은 먼곳에"등의 촬영셋트장이라는데, 입장료가 따로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서울의 6,70년대 시가지 한쪽에 탄광촌을 재연해 놓았다.

시가지의 양장점, 구두방, 만두가게, 포목점 등은 어린시절 엄마 손을 잡고 따라 나섰던 시장풍경 그대로.

사진 속 응달과 지붕에 쌓여있는 눈과 고드름은 셋트의 일종이다.

 

 

비탈을 따라 오르면 사랑과 야망의 달동네 셋트장.

재개발로 서울에서는 이제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지방 군소도시에서는 아직도 쉽게 볼 수 있는 달동네.

우물가에는 동네아낙들의 수다가, 전방 근처에서는 술추렴으로 목소리가 높아진 동네 어른들이,

뒷골목에서는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조무라기의 모습이 보일것만 같다.

 

 

 

여수 향일암에서 일박하기로 하고 들어가는 길, 해가 길어 화포 일대의 낙조 모습을 담을 수 있겠다.

8~9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화포 입구로 찾아 갔다.

촬영포인트는 노부부가 사시는 옥상 위. 할머니에게 양해를 얻는데 허락을 안해주신다.

할 수 없이 길 위에서 화포의 초가집을 주제로 갯벌을 담아보지만 어딘지 심심하다.

 

 

 

그래도 해가 남아있다. 서두르면 와온만 일몰을 담을 듯 하다.

길을 달려 다시 와온으로... 봄날씨 치고 석양을 담기에 그만이다.

아니 와온만의 석양을 사진에 담으며 일행 모두에게 느긋한 시간을 줬어야 했다.

 

몇 해 전 담았던 용산에서의 와온만 일몰 풍경사진이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

욕심을 내서 기억을 더듬어 용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를 찾아,

바튼기침을 하며 용산 전망대에 올라섰지만, 나의 욕심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해는 꼴딱 지고 말았다.

 

일행 들은 사진을 찍지는 않지만, 전문가 못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

자연의 풍경은 빛의 조화다. 아무리 멋진 풍경도 빛이 따라주지 않으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와온만 일몰이 좋았는데 시간도 맞지 않는 이곳 까지 힘들게 왔느냐는 눈치가 역력하다.

사진에 대한 욕심이었다.

 

아니 코스에 대한 자만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디를 어떻게 가면 시간이 얼마 걸릴 것이고, 이쯤되면 이런 풍경은 담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과욕이었다. 화포의 일몰도, 와온만의 황홀한 석양도, 용산 전망대에서의 느긋한 낙조도,

욕심 앞에서 꺼져가는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내 욕심으로 인해 일상에서 벗어난 편안한 여행길이 잠시나마 일행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말았다.

해는 지고 전망대에서 포진하고 있던 사진사들이 장비를 거두고 철수하는데 퇴각로가 나와는 다르다.

이튿날 알고 보니 순천만 갈대밭에서 목재데크로 용산전망대까지 산책로가 마련된것이다.

 

와온만을 거쳐 여수시내까지 이르는 길은 교행차량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적한 지방군도를 따랐다.

여수시내까지 말 한마디하지 않았다.

사진 욕심에 대한 반성에서가 아니라 화포와 와온만과 용산 어느 한 곳, 사진을 건지지 못했다는 실망감.

오히려 일행이 나를 위로한다.

 

 

 

 그래, 남들 다 찍은 그런 사진에 목숨걸일 없다.

아니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어렵게 시간낸 일행들의 분위기를 다운 시킬 수는 없다.

일몰 쫓아다니느라 지칠대로 지치고 배도 고플만큼 고프다.

저녁은 동백회관의 회정식.

 

일인당 일만오천원, 한상에 6만원 하는 회정식이 감격 그 자체이다.

워낙 허기진데다 대식가들인 일행들의 식성 탓에 카메라 들이되었다가는 뼈도 못추릴 듯 해,

증거사진을 남기지는 못해지만, 오동도 입구 동백회관 회정식 앞에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4명이 앉아 넉넉한 상에 차가운 음식, 따뜻한 음식, 뜨거운 음식. 이렇게 세번의 상차림이 나온다.

물론 서울의 이렇다하는 일식집이나 횟집에도 이 정도 나오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가격이 비싸다.

육만원 한 상인 가격으로 이정도 먹을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 이곳 뿐이다.

사진 욕심에 일행 모두를 피로하게 했던 만행이 맛집 안내 잘한 덕에 모두 용서가 된다.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향일암까지는 한시간을 더 가야하는데 포만감 뒤에 밀려오는 피로감.

운전을 시작한지 3년쯤 되는 후배가 걱정된다. 해안도로 또한 초행길에 만만치 않은 코스.

운전하는 재미에 한창 빠져서 인지 피로한지 모르고 길을 달린다.

해안가 절벽을 달리거나 때로는 헤어핀 코스를 잘도 운전한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이용하거나, 여행코스를 둘러보며 해결했던 생리작용에 내가 걱정이다.

구입한지 얼마 안된 새차인데다, 교행하는 차량도 없이 포만감과 피로감으로 지친 일행들은 조용할수 밖에.

차를 함께 탄지 12시간째, 긴장이 되어 참지 않으려고 해도 참아지던 것이 이제는 제 스스로 분출을 시작한다.

뒷좌석에 앉은 터라 그중 다행이지만,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운전자가 타이어 펑크가 났는지 알 정도.

더구나 직물시트가 아니라 가죽 시트이다 보니 소리는 어느때 보다 우렁차다 못해 소닉붐 만큼 진동도 크다.

한, 두번은 운전자가 자기 귀를 의심하더니, 이윽고 소리의 진원을 알고는 소리가 날 때 마다 창문을 연다.

물론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데, 개스가 분출되어 기도로 흡입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은 그러려니 이해를 하는데 반해, 운전하는 후배가 유난하다.

3월의 남도지방이라 추위는 없지만, 밤 공기가 시속 7~80km로 들어오는 뒷좌석의 체감온도는 낮기 마련이다.

 

이쯤되면 방귀 뀐 사람이 성낼만 하다.

인조가죽 시트에 조용한 차량 실내안이어서 그렇지, 무색무취무미의 개스가 해로운 것도 아니고, 어쩔수 없는 생리작용인 것을 그렇게 타박을 할 수 있느냐는 논리와 선배의 뱃속에 있던 개스를 흡입 할 수 없다는 과학적, 위생적 논리가 상충하는 바람에 해안가 어촌마을의 고즈넉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둘다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입장.

참다 참다 괄약근의 긴장완화에서 나오는 생리작용과 그것을 참아 낼 수 없는 결벽증과의 상충.

어쩌면 참을수 없는 생리작용과 그로 인해 들어야 하는 잔소리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제 편한대로 차곡차곡 쌓여있던 개스를 다 뿜어내고야 결벽증에서 비롯된 잔소리는 끝이나고,

추위에 떨어야 했던 일행은 창문을 닫고 목적지인 향일암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일행의 여행 습관 중 하나가 숙박비 흥정에 있다.

가격의 높고 낮음이 이라기 보다,  그 과정을 통해 좀더 안락한 숙소를 구하는 것이다.

오랜 노하우 덕분에 저렴한 가격에 깨끗하고 따뜻한 민박집을 구할 수 있었다.

 

 일찍 잠든 덕에 일찍 잠에서 깨어난다.

 아침해가 늦은 덕분에 향일암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밤새 전국의 대도시에 찾아 온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암자로 향한다.

오래전 바위 비탈이었던 곳에 계단이 잘놓여 있다. 계단은 가파르고 아침공기는 차다.

 

향일암은 지리산 화엄사의 말사로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 조선 숙종 때 다시 지어졌다.

지방문화재 제40호로 낙산사의 홍연암,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도 보문암과 함께 한국의 4대 관음기도처 중 하나이다. “해를 향한 암자”라는 뜻의 향일암은 여수시 돌산읍에 644년(신라 선덕여왕 13년) 원효대사가 원통암으로 창건하였다. 기암절벽 위에 동백나무와 아열대 식물의 숲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해 수평선의 일출광경이 특히 장관을 이루어 숙종 41년(1715년) 인목대사가 향일암이라 명명하였다.

 

 

 

일출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 어느때 보다 지루하다.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낮을 때는 해가 떠오르기 직전, 대부분 한낮의 활동복장으로 그 새벽의 추위 속에서 망망한 시간을 기다리려니 춥고, 졸립고, 지루할 수 밖에 없다. 아침잠 많은 저녁형 인간에게 일출명소로의 여행은 달갑지 많은 않다.

 

바다 위 낮게 드리워진 해무, 그 위를 뜷고 태양이 떠오르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함께 카메라 후레쉬가 터진다.

일생에 있어 향일암에서 두번째의 일출 맞이.

종루 옆 등나무 사이 사이 인근에 떨어진 붉디붉은 동백꽃 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재미있어 한참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는 사이 일행은 암자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녔나 보다.

사진촬영 포인트를 알려주는데, 일출 시간에는 암자 전면이 해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고스트와 프레어로 사진이 잘되지 않는다. 사진이 되지 않는 다는 핑계로 발품을 팔지 않은 것이 나중에는 후회스럽게 됐지만, 등나무 사이 꽂아 놓은 동백꽃 송이는 사진 속 보다 내 마음 속에 오래 간직 할 수 있었다.

 

부지런한 일행들 덕분에 암자에서 아침공양을 드렸다. 공양주들도 친절하고, 공양드리러 오신 보살분들도 상냥하다. 그집의 인심이 광에서 난다면, 그 절의 인심은 공양간에서 나온다. 이 말은 음식의 질이 좋고 낮음,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찾아오는 보살들이나 공양간에서 일하는 공양주들의 표정을 보면 그 절의 인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 해가 드리워진 공양간에서 찬은 없지만(절밥은 다 맛있다) 시장이 반찬이라, 두그릇이나 가져다 먹는다.

 

십수년 전, 남도 땅을 흘러흘러 이곳 까지 왔다, 거북목이 바로 보이는 주차장에서 양파와 감자를 적당히 썷어 넣고 볶은 스팸과, 드넓은 남해와 어촌을 바라보며 해먹던 그날 아침밥은 어느 진수성찬 못지 않게 맛있었다.

얼굴을 부딪치는 바람결과 햇살, 저 아래 펼쳐져 은빛 물결 반짝이는 남해바다, 조용하고 한적해 보이는 바닷가 어촌 마을, 이 모든 것이 밥과 반찬에 녹아 들어 몸안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

별 반찬 아니어도 밥 한끼 맛있고, 멋있게 먹었던 기억은 아마 평생 갈 것이다.

 

향일암을 내려오는 길에 갓김치를 맛보는 것은 필수. 같은 전라도 산 갓김치여도 돌산의 갓은 그 씹힘과 톡 쏘는 맛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돌산 갓에 입맛을 들인 사람이라면 돌산 갓외의 갓김치는 갓김치로 치지도 않게된다. 십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때 인심 그대로, 막걸리 한잔에 갓김치를 양껏 먹어 볼 수 있다. 양껏 먹어보라고 해도, 그 특유의 맵고 톡 쏘는 맛에 많이 먹지도 못하지만, 남도 땅의 그 넉넉한 먹거리 인심은 정신적 허기를 메워주는데 충분하다.

 

함께 여행을 다닌지가 15년쯤 되니, 이제는 어디를 함께 갔었는지 그 기억이 엉킨다.

다른 팀과 갔던 것을 우리멤버와 같이 간것으로 기억을 하는가 하면, 뻔히 같이 갔음에도 간적이 없다고 발뱀을 하는 통에 하루에도 몇 번의 언쟁이 오고간다.

 

돌산대교 공원 또한 그렇다.

돌산대교 공원이 생긴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일행 중 선배가 자꾸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사진도 없고, 기록도 없으니 우기는 사람이 장땡.

 

여수항의 관문이랄 수 있는 돌산대교를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느긋해진다.

지중해 남부유럽의 풍경에 뒤지지 않는다. 내 입맛에 맞는 먹을거리가 지천인 이곳.

몇해 동안 해외여행 가지 못한 것에 대한 위로를 이곳 돌산공원에서 여수 앞 바다를 바라보며 받는다.

 

 

 

여수 진남관은 1598년(선조 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건물로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기지로서의 역사성과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창한 당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규모가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면적 240평으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진남관의 평면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서측 각각 2번째 협칸의 전면 내진주를 이주(移柱)하여 내진주 앞쪽에 고주(高柱)로 처리하였다. 이 고주는 곧바로 종보를 받치고 있고 대량은 맞보로 고주에 결구하여 그 위에 퇴보를 걸었다.

전후면의 내진주와 외진주 사이에는 간단한 형태의 퇴량을 결구하였고 측면 어칸에는 2개의 충량을 두어 그 머리는 내부 대량위로 빠져나와 용두로 마감되었다.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위에 짜여진 포작은 외부로는 출목 첨차가 있는 2출목의 다포계 수법을 보이고, 내부에서는 출목첨차를 생략하고 살미로만 중첩되게 짜서 익공계 포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출목에 사용된 첨차에는 화려한 연봉 등의 장식을 가미하였고 특히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초공을 사용하였다.

각 주칸에는 1구씩의 화려한 화반을 배열하여 건물의 입면공간을 살려주고 있으며, 내·외부 및 각 부재에는 당시의 단청문양도 대부분 잘 남아 있다.

또한 건물 내부공간을 크게 하기 위하여 건물 양측의 기둥인 고주(高柱)를 뒤로 옮기는 수법을 사용하여 공간의 효율성을 살리고, 가구는 간결하면서도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건물의 양측면에는 2개의 충량(측면보)을 걸어 매우 안정된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등 18세기초에 건립된 건물이지만 당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여수 진남관

 

진남관 대청마루에 자원봉사자들이 콩기름을 먹이고 있다. 그래야 목재가 벌레가 먹지 않고, 오래 보존 할 수 있단다. 대한민국에서 큰대자로 드러누울 수 있는 가장 큰 대청마루가 이곳 여수 진남관이 아닐까 싶다. 어느 따가운 햇살이 내려쬐는 여름날, 바람 살랑살랑 부는 이곳 대청 마루에서 큰대자로 자고 일어나면 배포가 마루 넓이 만큼 넓어질것 같다.

 

진남관 뜨락에는 때맞춰 핀 매화 향이 바람결에  나부낀다.

 

가는 날이 장날, 일행들과 어디를 가면 그날이 꼭 장날이다. 진남관을 보고 여수를 빠져 나가는데, 장날과 겹쳐 진땀을 뺀다. 후배는 무슨 음식이 잘못됐는지 두드러기가 난다고 피부과에 들려 약을 처방하고, 그 사이 시장을 둘러보겠다는 것을 한사코 여행일정에 올려놓느라고 애를 먹었다.

 

시장 구경은 꼭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어차피 시장 가서 먹거리 사는 것, 둘러보다 싸고 좋은 물건 있으면 사는 것이 당연할진데, 시장 구경한다고 사람들에 치이는 것이 너무도 싫다.

 

거북선이 만들어졌다는 선소를 둘러보고, 낯선 길을 따라 좀처럼 인적 없는 길을 통해 와온을 들려 순천만까지 왔다.

 

 

 

순천만 대대동 갈대밭.

 

오래전 이곳에 와 서 있은 적이 있다. 갈대꽃도 지고, 철새도 이렇다하게 날아 다니지 않는 대대동 갈대밭에서 서걱거리며 갈대가 부비적 되는 소리를 가슴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아주 더 오래전 혼자 이곳을 찾았노라고 전하는 그에 먼 시선에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이나, 더 오래전이나 생활에 변화가 없다는 푸념에, 예의 그 서늘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 살아있음에 감사해! "

 

살아있음에 감사한다는 그의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내 깊은 곳, 숨겨져 있던 서러움에 공명을 주었고, 그 공명은 목울대를 뜨겁게 달궜다.

 

십수년의 세월, 그 사이 내주변 사람들은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머물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진심으로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구름 한점 없는 3월의 남도 햇살이 대대동 일대 갈대 위로 쏟아진다.

사람들에게 깨닮음을 주는데 있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적재적소에 적당한 한, 두마디, 그외의 말들은 허공으로 날아가도 그만이다.

 

순천만 갈대밭을 보고 실질적인 이번 여행의 백미는 끝이 났다.

한군데를 더 선정해 둘러보고 숙박한 뒤 아침 일찍 출발해야 월요일 일하는데 지장이 없다.

모처럼 이곳까지 내려왔으니 벌교 꼬막정식은 꼭 맛보자고 일행을 설득한다.

저녁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고 낙안읍성에 숙소를 잡고 다시 나오기는 귀찮은 일.

 

몇 해 전 취재차 반나절 들렸던 강골마을을 들려보기로 했다.

이름난 관광지도 아니지만 일행들의 기호에 딱 맞을 듯 싶다.

득량역을 지나 강골마을 이용욱 가옥 앞에 섰다.

 

 

 

 

강골마을 우물가에는 담장 사이 작은 창을 내어 마을 아낙네들의 소문을 들을 수 있는 시설이 되어있다.

소통의 수단, 혹은 민심읽기, 쓰임에 따라서는 도청의 수단이 되었을 수도 있다.

모름지기 그 용도는 품을 수 있는 사람의 인품에 따르리라.

 

취재 당시만 해도 많이 헐었는데, 그사이 보수도 많이 되어있고, 정성을 들여 마을을 가꾸는 지킴이도 생겼다.

 

 

강골마을 뒷편 열화정

 

영화 " 혈의 누" 촬영지이기도 한 곳, 양반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

연못가에 커다란 동백나무에서 송이채 톡 떨어진 동백꽃이 발걸음에 채인다.

며칠 묵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둘러본다.

득량역 인근에는 반나절 등산코스지만 그 모양이 기기묘묘한 오봉산도 위치하고 있다.

 

 

 

강골마을 고샅길 담장 옆에 핀 매화

 

 

벌교에 들리면 짱퉁어탕과 꼬막정식은 꼭 먹어봐야 할 먹거리.

꼬막은 개고기와 더불어 사람과 비슷한 살성을 가지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조개를 먹으면 잘 채하던 체질임에도 꼬막은 없어서 못먹는다. 꼬막탕, 꼬막회무침, 꼬막데침, 꼬막전, 꼬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이 꼬막정식 한상에 다 차려나온다.

 

 

 

낙안읍성

 

성곽을 따라 걷다 내기가 벌어졌다. 혜미읍성과 둘 중에 어느 읍성이 더 큰가이다.

당연히 나는 낙안읍성에 손을 들었고, 후배는 혜미읍성. 결과는 내가 패했다. 혜미읍성이 조금 더 크단다.

무슨 착각이었을까, 혜미 읍성 안에는 휑덩그러니 아무것도 없어서 였을까? 내 눈썰미나 판단력이 예전만 못하다.

 

 

어느 읍성, 관아를 가나 마을 원님이 하는 일은 악당을 잡아 곤장을 치는 일이다.

내 눈에는 치도곤을 당하는 대상이 탐관오리의 제물로 보이는 것이 뭔가 피해의식이 가득찬듯 하다.

그래서 였을까? 물볼기를 맞고 있는 마네킹의 죄명이 알뜰하게 쓰여있다.

불쌍한 것은 마네킹의 벌린 입에 누군가의 소행으로 돌맹이가 한 가득 있다는 것이다.

심심풀이로 했겠지만, 못된 짓들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 있나보다.

 

 

한반도의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금둔사의 홍매보다,

담장에 드리워진 백매가 눈길을 더 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홍매로 유명한 금둔사와 구레 시내와 지리산 노고단 일대 조망권이 뛰어난 사성암에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