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TRAIN/SOUL TRAIN

북한산 백운대-사자능선 단풍산행

오체투지해무 2010. 5. 6. 17:59

도선사 입구 한일상회 앞 9시 50분. 창동역 에서 마을버스를 이용 도선사 입구까지 오는 시간동안 단 한 통의 문의전화도 없었다. 매주 산행을 같이 한 동서남북들도 일이 생겨 모처럼 널널한 산행으로 범띠방 친구들과 산행의 기쁨을 나누고자 했지만 아무도 안 올것인가 보다. 주말에 치악산 가지 않으면 오겠다는 친구의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서 친구도 역시 못 오나 보다. 정확히 10시 캔디폰인 울지 않는 PCS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김밥 두줄을 사 배낭에 집어 넣고 묵묵히 그 아스팔트 길이 깔린 도선사까지의 길을 걷는다.

 

정확히 몇 살 때 처음으로 이 길을 올랐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이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30년이 가까워 오는 세월이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눈이 많이 온 날 부모님과 여동생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올랐던 기억, 6학년 겨울 방학 무렵 친구와 셋이서 찾아왔던 기억,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친구들과의 기억, 그 이후 부모님과 이곳을 오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기억 할 수 없게 수없이 오르내리던 도선사 포장길.

 

유명한 요정집이였던 고향산천 앞에선 고어텍스에서 나와 무료A/S행사를 벌이고 있다. 프랑스생수회사인 에비앙에선 판촉전의 일환으로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산행객들에게 무료로 에비앙 330ml 생수를 나눠주고 예외 없이 하나 받아들고 찹찹한 입안에 한 모금 털어 넣는다.


고향산천 앞에서 차량을 통제함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안할 정도로 빨리 달리는 승용차. 파일 자켓을 벗기 귀찮아 입고 올랐더니 20분 남짓 오르막길에 머리는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됐다. 이 땀에 술독이 빠져 나갈 것이란 생각에 한방울, 한방울, 땀방울이 마치 보약 엑기스 같이도 느껴진다.

 

파일 자켓을 벗어놓고 입장료를 끊어 우이산장 앞을 지난다. 주말에 치악산에 안가면 오겠다던 친구의 말 때문에 10시 정각에 한일상회 앞을 출발한것이 마음에 걸린다. 잠시 배낭을 벗어 놓고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핸디폰으로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란 말과 함께 '어디냐'란 말이 먼저 나온다. 난 이런 질문에 '거래처지'란 말로 응수를 하지만

 

"여보세요. 어디냐?"
"응, 여기 강촌"
"치악산 안갔구나. 혹시나 이 근처에 오지 않았나 싶어 전화했다."
"누구 누구 나왔냐?"
"한명도 안나왔다."
"어디쯤 인데"
"하루재 오르막길이다. 담에 통화해"
"잘 다녀와라"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나고 하루재로 올라온 시각이 10시 30분 헐떡거리는 숨을 하루재에서 인수봉에 붙어 암벽등반에 열중하고 있는 바위꾼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달랜다. 올해는 여름철 강우량과 고온현상으로 단풍이 최악이라고 한다. 하지만 7부 능선까지 물들기 시작하는 하루재 일원은 곱게 채색되어 있어 모처럼 찾은 등산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 충분하다.


배낭을 챙겨 등산로로 나서려는 순간 대학생인듯한 남자애가 담배를 뿜어낸다. 하필 그때 그 앞을 지나니 고의는 아니어도 살짝 불쾌하다.
인수산장 근처 혹시 아는 산꾼이라도 있나 잠시 두리번거리고 수덕암쪽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수덕암 대웅전에 예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보니 이곳 수덕암을 수없이 지나쳐도 예를 드린 적이 없다. 불교신자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대웅전 앞에서 간단한 예를 올리게 됐다.


얼마만의 호젓한 산행인가. 대충 머리 속에는 촛대봉 능선으로 해서 백운대-만경대-동장대-보현봉-사자능선으로 코스를 잡고 촛대봉 우측 릿지길로 다니다 안 가본 정면 돌파를 해본다. 말이 돌파지 그냥 워킹산행이다. 바위재미는 없지만 만경대에서 족두리봉으로 내려온 릿지와 인수봉에서 오름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추모비 있는데서 사과 반쪽을 먹으며 인수봉 거벽길과 빌라길 인수B, 의대길등에 붙어 있는 바위꾼들을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노라니 인수봉 그 바위 결들이 살아나 꿈틀 꿈틀 움직이는 것 같다. 잘 다듬어진 근육질의 섬세함보다는 강인함이 엿보이는 바윗 결이 금새라도 나를 안아 올릴듯하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인수봉을 본지도 얼마 만인가, 이래서 호젓한 산행의 맛이 또한 다르다. 여럿이서 가다 보면 웃고 떠드느라 산이 얘기해 주는 것을 들을 수 없을 때가 많다.


"구조대,구조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인수봉 남측 정면 벽 대슬랩 위에서 들린다. 사고가 났나 본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선 어떤 사고인지 알 수 없다. 바위꾼들이 소리를 외쳐 인수산장근처에 있는 구조대에게 전하는 소리가 들린다. 큰 사고가 아니기를 바라며 자리를 일어선다. 어떤 사고일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오름짓을 구경하느라 30분 여를 지체했다.

 

촛대봉 정상. 이른 시간이라 인수봉 서면 오버행 하강길에는 사람이 없고 드물게 비둘기길 5.7등급에 초보인듯한 사람들이 꽤 많이 붙어 있다. 인수봉 후면 뱀길에서 인공등반으로 오버행 크럭스를 돌파하는 사람이 꽤나 엉긴다. 바위경험이 상당한 사람인 듯, 숨은벽 슬랩으로 오른 사람 몇이서 선등이 저러면 후등자들이 불안하다며 입방아를 찢는다. 어딜 가나 섣불리 입방아를 찢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주말의 북한산, 도봉산 릿지길에서는 그런 사람들로 공해다.


캔디폰이 왠일로 벨이 울려 받아보니 끊어진다. 011은 잘도 통화하는데 PCS는 영 안 좋다.
'누굴까?' 혹 나를 찾아 산에 온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 반, 걱정반.

애들과 왔다면 구경 시켜줄 겸 호랑이굴을 통과해 오르겠지만, 직등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나다니며 눈여겨보질 않아  직등을 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촛대봉을 내려서니 갑자기 사람들이 많아진다. 호랑이 굴 위에서 보조자일로 위태위태하게 하강하는 아줌마들을 보면서 저러다 사람 잡지 하는 염려가 든다. 남자들이야 웬만한 완력이 있으니 20미터정도 되는 완만한 슬랩과 페이스에서 줄을 잡고 내려오면 되지만 아줌마들은 겁을 먹거나 하면 그대로 얼어붙어 팔힘이 떨어질 때 까지 매달려 있다, 추락하는 일이 종종 있다. 무사히 하강을 한다. 차분한 모습을 보니 릿지 경력들이 배어있나 보다.


호랑이굴을 직등하려면 언더크랙을 잡고 올라서야 한다. 사이드크랙을 짝힘으로 잡고, 슬랩으로 4~5미터 트래버스, 홀드를 잡고 일어서 슬랩으로 올라서면 된다. 일전에 이곳에서 오르던 등산객이 추락, 다행히 나무에 걸려 찰과상으로 그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언더크랙에서 아무생각 없이 오르다 제풀에 두번 미끄러진다. 다시 차분히 언더크랙을 잡고 일어서, 사이드 크랙으로 손을 옮기고, 왼쪽 발을 스탠스에 살며시 디디는데 약간 발이 밀린다. 균형이 맞지 않아서 그렇다. 심호흡을 하고(긴장해서 호흡이 엉키면 그로 인해 몸의 균형이 깨지기도 한다) 오른발을 지긋이 밀어붙인다. 오른쪽 사이드 크랙으로만은 균형을 잡을 수 없어 왼쪽 손을 슬랩의 작은 돌기를 찾아 손으로 모아 잡아 보지만 잡히는 것 하나 없이 발을 믿고 일어서야 하는데 몸을 바위에 붙인 탓인지 신발이 돌아가면서 밀린다. 이럴 땐 과감해야 한다. 11자로 발을 곧추세우고 몇 걸음 트래버스 한 후 왼쪽 손으로 머리 높이에 있는 홀드를 잡고 일어섰다. 60도 정도의 슬랩, 확보물이 없어 바싹 긴장해서 한걸음 한걸음 딛고 일어서 호랑이굴 위에 섰다. 비로소 안도감과 함께 성취감이 든다.


뒤를 쫓아 많이 와 본 듯한 젊은이가 트래버스 구간에서 한번 멈짓하더니 이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올라선다.

20여 미터의 완만한 슬랩과 좌측 침니로 만 다녀서 우측 크랙으로 올라가 본다. 바위가 미끌 미끌 한데다 트래버스 하는데서 긴장했던 탓인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자꾸 밀린다. 크랙을 짜게면서 올라선다. 껌길인데 숨이 차다.

 

백운대 정상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그 시각이 12시 30분 혹시라도 내가 올린 글을 보고 백운대에 와 있지 않나 혹은 아는 사람 없을까 싶어 정상 태극기 주변과 뜀바위 하단을 살펴보지만 아무도 없다. 시간상으로 점심식사를 해야 하지만 왠지 먹히지도 않고 사과 반쪽과 물 한모금, 담배 한 개피를 피고 슬랩으로 내려선다.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쇠말뚝길의 사람들이 부러움 반, 걱정스러움 반으로 슬랩으로 내려서는 릿지꾼들을 올려다 본다. 이곳에선 인파들로 인한 안전사고가 따라 산악경찰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어 경솔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제재를 한다. 정면 슬랩으로 내려서는 사람들을 가끔씩 살피기만 한다. 매번 이곳을 내려 설 때 마다 스타의식을 느낀다. 쇠말뚝으로 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는 말들 때문이다.

 

"미쳤다."
"어휴 어떻게 저기로 내려서니."

 

요령만 숙지하고 추락에 대한 공포감만 이기면 누구나 내려 설 수 있는 길이다. 특별한 기술이 요하는 곳이 결코 아니지만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위험하다. 먼저 내려선 3명의 40대 아줌마 아저씨들이 20여 미터 슬랩에서 엉거주춤 조심조심 내려선다. 이곳은 추락의 위험이 없기 때문에 발이 밀린다 싶으면 뛰어 내려오면 되는데 요령이 없어 엉긴다. 그 사람들이 내려선 후 뛰다 시피 내려오니까 괜히 미안하다.

 

위문에서 올려다보면 윈숭이 바위라고 하는 반 침니로 오르는 바위가 있는데 사고가 많이 나 그쪽으론 오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침니는 짜증이 난다. 만경대 첫머리까진 깔딱이다. 숨이 헉헉 차 올라도 술독을 뺀다는 생각으로 한달음에 올라섰다. 멀리 도봉산 선인봉, 오봉이 보이고 백운대 장군봉 아래가 적갈색으로 곱게 단풍이 들어 있다. 집중호우로 난리가 났던 장흥 쪽 산과 그 너머 노고단 감악산 쪽 산 능선에서 산사태가 나 시뻘겋게 내려앉은 모습이 흉물스럽다. 마치 아이스크림 위에 흘러내린 초코시럽 같은 모습이다. 8월초 집중호우는 정말 무서웠다. 지형을 바꿔 놓고 계곡을 새로 만들었으니 자연회생 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가야 할까. 하지만 그건 천재지변이고, 자연의 법칙이다.

 

만경대 초입은 전망이 좋아 여기 저기서 점심식사를 들거나 오수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추락사고가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와이어를 잡고 돌아서니 부부인 듯한 사람 둘이 직등으로 올라간다. 홀드와 스탠스 모두 양호한 편이지만, 고도감이 상당하고 확보물이 없어 추락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곳이다. 부인이 먼저 와 봤던듯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이쪽으론 안 와 봤는데 이쪽이 A코스인가 보지."
"그 소나무 있는 데로 돌아서세요, 갈 수 있으시겠어요?"

 

아저씨가 먼저 차분하게 올라서서 안전한 소나무 있는 곳으로 가 서 있는다.
오히려 그쪽으로 올라가라던 여자가 고도감 때문인지 우물쭈물 불안한 자세를 취한다.
밑에서 보기에도 불안하다. 젊은 사람 한 명이 뒤로 붙어 차근차근 알려줘서 통과한다.

 

점심식사시간이라 그런지 만경대 능선엔 움직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뜀바위를 통과 턱걸이 하듯 내려서는 곳을 지나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친구다.
"어 난데 어디쯤이냐?"
"만경대 중반부다."
"어디로 내려올꺼야?"
"구기터널에 6시 정도면 도착하겠지."
"그래 그럼 6시에 구기터널에서 보자."
"그래도 되고."

 

아침 산행 약속도 안지킨게 미안해서인지 하산주나 같이 나누려고 하나 보다.

만경대 중간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김밥을 먹기로 한다. 혼자 이다 보니 별로 먹고 싶진 않지만 사자능선까지 가려면 허기가 지고 때를 놓치면 안된다. 먹긴 먹지만 김밥엔 이제 물리기도 했고, 별 식욕도 없다. 넉넉하게 두 줄을 사왔는데 한 줄을 먹으니 더 이상 먹히질 않는다.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 만경대, 노적봉, 장군봉 아래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을 바라본다. 작년 이맘때도 와 보고 매해 느끼는 거지만 북한산 단풍 중 이 일대가 가장 아름답다. 북한산성쪽은 북사면이라 5부능선 쯤 물들고 우이동쪽은 7부 능선쯤, 멀리 도봉산은 오봉 야영장 일대와 칼바위 능선 쯤이 물들어 있다. 서울쪽 상공은 스모그로 희뿌옇다. '비가 좀 와야 되는데.'


원효릿지에도 별로 사람들이 없다. Y자 바위에도 그렇고 염초봉 밑에 일단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지 울긋불긋 옷색깔이 보이고 말바위 쪽은 백운대에 가려 안 보인다.

 

'좋다. 참, 좋다.'

 

설악산으로 따져 원효릿지는 천화대 같고, 이곳 만경대릿지는 용아장성릉이나 미니공룡능선 같다.

부인이 남편에 비해 참 젊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따로 따로 왔나 보다 남자가 훌쩍 가고, 여자는 혼자서 휴식을 취하다 저 앞으로 가는데 얼굴이 딱히 어디가 이쁘다고 할 수 없이 반듯반듯하게 깨끗하다. 나이를 짐작할수 없다. 20대 후반 같기도 하고 얼굴 표정을 보면 더 나이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몸매도 바위하기 좋게 늘씬늘씬하다.

 

친구와 6시에 구기 터널에서 보자고 했으니 좀 서둘러야 한다. 점심을 먹고 일어선 시각이 2시 40분, 대남문 까지 2시간, 세검정까지 1시간 반 빡빡하다.

 

용암문 쯤 지나 성곽에서 내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세분이 곱게 물 들어가는 오솔길 옆 단풍나무들을 바라보며 '곱기도 해라'라고 한다.  젊다고 하기엔 이미 나이 들어 버린 이제 중년으로 들어서는 아주머니들의 얼굴에서 여학생의 모습이 엿보인다. 때가 되면 새 옷을 갈아입는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는 모습엔 어여쁨이 담겨 있다.

 

유난히 외국인들이 많고 이들과 함께 온 한국사람들의 유창한 영어가 듣기 매끄럽다. 영어 공부는 계속 해야 되는데, 생각도 잠시 동장대에서 우이동 쪽을 잠깐 바라보고 계속 발길을 재촉한다.

 

목도 마르고, 허기가 지지는 않는데 자꾸 근력이 딸린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같은 방향의 산행객들을 추월하면서 가긴 하지만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이런 체력으로 동계 지리산이며, 서북능을 넘나들었지 이젠 힘 들 꺼야 하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내가 일해서 벌 수 있는 시간을 생각해 본다. 앞으로 15년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몰라.


다섯, 여섯살의 아이의 손을 잡고, 어떤 부모는 세살배기 아이를 아기배낭에 담고 걷는 부부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며칠 전 고등학교동창들과 나눈 술자리에서 5학년 딸아이의 브래지어를 사주었다는 친구의 얘기가 떠오른다. 이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맞바로 운 좋게 낳아도 이 길을 함께 걸으려면 내 나이 40대 중반이 넘겠지. 까마득하다.


혼자서 산행을 하다 보니 근교산행에서도 나와 대면 할 수 있다. 그 대면하는 것이 어느 때는 높디높은 거대한 암벽 앞에 서있는 것같이도 느껴지고, 지척을 구분하기 힘든 안개 속 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땀흘리며 내면과 만나는구나.

 

정릉 쪽 칼바위에 사람들이 빽빽이 넘어가고 있다. 이쪽에서 보면 칼처럼 서서 위태위태해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경사가 별로 없어 넘어서는데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암릉의 폭도 좁긴 하나 초심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몇몇 사람들이 저길 위험해서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눈길로 그쪽을 바라보며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 대남문 못 미쳐 보현봉릿지 까지는 두개의 봉우리를 더 넘어가야 하는 곳 보국문 내리막에서 잠시 물 한모금을 마신다. 600ml두개를 가져 왔는데 하산까지는 조금 모자라겠다.

 

보국문 주변은 북한산성 개축공사로 우회하게 되어 있다. 그 바람에 길이 아닌 곳이 상당히 심각하게 훼손 되어있다. 물론 개축공사비에 복구비도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 나무들과 수풀들이 자생력을 갖고 원상복구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될까. 조순 시장이 있으면서 가장 돋보이게 서울을 갖꿔어 놓았다면 성곽과 유적지의 원상복구 일 것이다. 역시 학자출신이라서 관심을 쏟는 곳도 남다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것들을 가꾸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인데 너무 쫓기듯 살아왔다. 산업화, 선진화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으려고 내달리다 보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산업화, 선진화의 불안함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표출이 되었을까?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어른들의 욕구 탈출구는 과히 건전하지 못한 곳으로 배출되지 않았는가. 괜히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대남문 못 미쳐 보현봉릿지 갈림길에 선 시각이 3시 40분 만경대 중단부 점심식사 한곳에서 꼭 한시간이 걸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시간이다. 맞바로 대남문을 거쳐 세검정 계곡길로 들어서면 시간도 남겠고, 인파들과 부딪치는 것이 싫어 빡빡한 시간이긴 하지만 보현봉릿지를 타기로 한다. 아기자기하게 재미있는 암릉 길은 3년 전 많이 찾은 코스라 슬슬슬 올라갔다, 슬슬슬 내려온다. 전문산악인차림의 금실 좋은 한 쌍의 부부가 나를 미소짓게 한다. 40대 초반 정도 됐을까. 하지만 릿지는 많이 안 다닌 듯 남자 보다 여자가 더 날래다. 보현봉 오름길 바위에서 쇠말뚝으로 안가고 룬제로 오르는데 남편이 부인 먼저 오르라고 한다. 뒤를 봐준다면서, 부인은 앞서 가라고 하고, 남편이 불안불안하게 올라선다. 부인은 성큼 성큼 올라서서 보현봉 정상에서 남편에게 기대  누우면서 심호흡을 몰아쉰다. 다정해 보이는 한 쌍이다. 젊은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보다 중년부부들의 다정한 모습을 주위에서 부러워하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이제 그 나이를 바라 볼 수 있는 나이쯤이 되니 알 것도 같다. 들여다 면 아웅다웅 아귀다툼을 하면서 사는 부부가 참 많다는 걸 보면서, IMF한파에 경제적 궁핍이 가정의 파탄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이좋은 인간관계는 그 주변도 환하게 밝혀준다. 나도 내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사람이 되야 될텐데.....

 

보현봉엔 언제나 할렐루야 산상기도 드리는 사람들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오늘은 그런 사람들이 없다. 언제인가 티브 보도로 나간 다음에 많이들 자제 한 덕인지, 일요일 문수봉 쯤 올라보면 가관이다. 문수암에서 틀어놓은 독경소리와 보현봉에서 울부짖는 광신도들로 저마다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모습을 이젠 안 봐도 되니.

 

보현봉을 내려 서는 곳은 가본 사람이 아니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길을 알고 간다면 어렵지 않게 내려 설 수 있지만 전면이 낭떠러지라 초심자에겐 상당히 주의를 요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클라이밍 다운을 하고 있는데 아래에서 중년부부의 대화가 이어진다.(원효릿지와 만경대는 그 난이도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많지만, 이곳은 수월한 탓에 중년이상이 많이 찾는다)

 

"내가 당신하고 안 왔으면 올라 갈 수 있는데 당신 때문에 고만 돌아가야 되겠어."
"아니 나 때문이라고 그러지 마세요. 당신이 올라가면 나도 올라 갈 수 있지."
"난 저번에 가본 곳이거든."
"그러지 말고 당신이 잘 가르쳐 주면 되잖아요."

 

내가 내려 온 후 남자가 먼저 올라선다. 많이 다녀 보질 않아 부인을 같이 데려갈 실력은 아닌 것 같다. 혼자 오신 50대 아저씨가 가보셨느냐 조심해야 한다며 위에서 요령을 알려준다. 급기야 부인이 당황하니 남편은 위에서 어찌 할 줄을 모른다.

 

"거기 먼저 내려간 젊은 분 여기 뒤에서 이분들 좀 봐줘요."

 

내려서든 길을 다시 올라서 몇 군데 발이 밀리지 않게 잡아 준 뒤 올라서는 것을 보고 돌아서 내려왔다. 조금 더 봐드렸어야 하는 건데 일찍 내려서는 내가 50대 아저씨는 못마땅한가 보다. 내가 생각이 깊지 않았다. 완전히 안전한 곳까지 올라 설 때까지 봐드렸어야 하는 건데. 부인은 남편의 도움으로 무사히 올라섰다.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한다.  보현봉 릿지는 마치 숫사자가 꼬리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사자능선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현봉의 암벽들이 사자의 갈기머리 부분이고, 부드럽게 세검정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사자의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호랑이 띠방 친구들과 개떼(?)같이 몰려와 이 사자꼬리를 지긋이 밟고 갔다면 '글쎄'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승가사가 마주 보이는 산 높이쯤 외국인 3명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물을 마시며 잡담을 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몇마디 나눠 볼까 하다 짧은 영어실력이 부끄럽기도 하고 꽤 긴 산행에 피곤하기도 하다. 보기에도 상당히 애 띤 젊은이들이다. 헤어스타일로 봐서 미군은 아닌 것 같다.

 

외국인과 헤어져 걷기를 30여분, 5시 20분이다. 지는 노을이 한참 아름답다. 어두워지더라도 길을 훤히 알고 있으니 노을을 바라보고 싶지만 친구와의 약속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전화를 걸어 오지 말라고 하기도 뭣하다. 지난 겨울 사자능선 들머리로 삼았던 곳으로 내려선다. 서울 그곳도 번듯한 호화주택지인 세검정 주택가에 돌과 진흙으로 쌓은 움막집에 세간살이들이 보인다.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할까? 안방으로 보이는 방엔 형광등이 벌써 켜져있다. 지난번 큰비로 앞마당을 휩쓸었는지 움막집에서 주택가로 내려서는 길이 황폐하기 그지없다.

 

정확히 하산로를 잡았다. 어느때 부터인지 이곳 구기 터널엔 콩요리집들이 들어섰는데 그중 하나인 옛날집 앞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 한 시간이 5시 45분 이 근처 어디 있는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냐?"
"고수부지 인데 왜"
"어, 산행이 길어서 좀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마."
"그래, 그럼."

 

어처구니가 없다. 8시간의 산행 후라 탈진 할대로 탈진했지만 조금 전 한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제껴버리는건 도대체 무슨 심보에서인가. 아침 약속도 그런식이더니, 이렇다 저렇다 설명도 없이 스스로 정한 약속을 스스로 깬다.

 

막걸리에 두부 한모라도 나눴으면 했지만, 생각 보다 긴 산행에 요기조기 릿지길로만 다녔더니 상당히 피로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혼자만의 산행이 되었다. 종각으로 향하는 428번 버스엔 하산한 등산객으로 꽉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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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때는 여행이나 생활에 대한 기록이 실제 그 당시에 처해 있던 것과 다르게 쓰여 질 때가 있다. 그 기록을 읽다 보면 그 글의 시점으로 본 느낌이 마치 여행이나, 생활의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 싫어서, 이런 기록들을 남기기 싫어졌었다. 하지만 자꾸 둔감해지는 기억력과 감성으로 산행으로 얻은 어떤 감을 자꾸 잃어버리게 되고, 그랬던가 하는 망각이 잦아져 오랜만에 시시콜콜하게 늘어 놓아봤다. 이번 산행을 글로 남기면서 집에서 어떤 마음으로 산행공지를 올리고 집에서 출발해 집에 돌아가기까지 대중교통에서 느낀 것까지 써 보려고 했지만,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의 치졸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들여 본다는 부끄러움에 감히 글로 옮길 수 없었다.

월간"山"11월호엔 탈레이사가르 조난자에 관한 특집이 실려 있었다.
낯이 익은 최승철, 김형진을 보니 눈물이 핑 돈다. 산에 대한 열정으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훤히 밝혀주던 사람들이었고, 개인적으로 봤을 땐 산에 대한 욕심 외엔 참으로 착하고 성실하기 이를데 없던 사람들이다. 최승철씨가 부인 김점숙씨에게 강고트리에 도착해 보낸 엽서엔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해 수도승들을 보니 수도생활을 위해 일부러 팔을 부러트린 승려를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산이란 고행생활을 통해 일종의 구도행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한다. 정말 일찍 하늘 나라로 올라가기엔 아까운 사람들이다.

여기 까지 긴 글을 읽게된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이 글을 통해 나와 같이 산행을 했다는 간접체험으로 받아들여주면 더더욱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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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20일에 쓰여진 산행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