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등등/月下獨酌

지난 겨울에게

오체투지해무 2009. 5. 21. 02:47

 

2001. 12. 황병산

 

다시 산에 다니기 시작해 빼놓지 않고 했던게 있지. 내 스스로하고의 약속도 아니였고, 산하고의 약속도 아니였지만, 폭설이 내린 지리산 주능을 종주하고, 혹한기 설악 공룡을 타며 동해에 데인듯 시린 파란 바다를 내 눈에 담아 오는 일.

어쩌면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는 그 일을 하고 난 해에는 누군가 어줍지 않은 성공담에 거드름을 피울때면 그 일을 떠올리고는 했지.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르는 길에 눈을 잔뜩 이고선 침엽수가 강풍에 나뭇가지를 찟기는 소리,  한발짝 차이로  북서풍이 설악의 바위를 날려버릴듯 부는 바람을 피하고 마시던 코코아의 따스하고 달착지근한 맛.

싸구려 꼬냑을 따라주며 너도 한번 양주 사야 할일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소리를 들을 때면, 하산 길에 우연히 동행한 사람들과 차가운 겨울바다 바람 맞으며 물치항에서 라면을 끓여 소주를 나누던 일을 떠올리며 빙긋 웃어주기도 했지.

늦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정처없이 방황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디던 버릇도 겨울철 귀떼기청봉에서 바람결에 흩날리며 얼굴을 때리던 얼음알갱이들을 맞을 생각에 떨쳐버리곤 했어.

일출을 보기 위해 설악산장을 나서는 일단의 산장 투숙객들이 대청봉을 향해 가는 푸르스름한 새벽 수은주는 영하 32도를 가리켰지. 서북능선을 타다 당일 하산을 하지 못하고 1,408에서 잘때는 무섭다는 생각 보다 오히려 차분했어.

미안해 겨울아. 올해도 그렇게 하지 못했어.
아니 서북능에서 비박을 하고, 중봉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지못해도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로, 사진 장비가 무겁다는 이유로 그 언저리만은 맴돌다 오고 싶었어.

미안해 겨울아. 시퍼런 동해바다에 하염없이 쏟아져 녹아드는 그 허무한 눈발을 꼭 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미안해 겨울아. 기다리다 기다리다 뒤늦게 불어준 한파와 눈보라에도 나는 너를 찾지 못했어.

미안해 겨울아, 정말 미안해.                                                            200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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