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같은 일요일.
문화생활도 즐겨야 하겠고, 주중에 하지 못했던 운동도 해야 하겠고...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휴일 마져도 바쁘게 보내야 한다.
입소문을 통해 들었던 영화 ' 워낭소리'를 시네큐브에서 첫회를 본 후,
체부동 시장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고 찾은 곳은 북한산 구기동 분소.
뇌출혈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국선배를 배려해 코스를 짧게 잡았다.
일요일 오후라 아침일찍 오른 사람들의 하산인파와 마주친다.
오랜 겨울 가뭄 끝이라 산길에는 먼지가 풀풀나고, 이참에 뒷풀이는 삼겹살을 외쳐보지만 씨도 안먹힌다.
대남문과 승가사로 갈리는 삼거리 쯤에서 한숨돌리고, 승가사로 출발.
발걸음이 무겁다. 알 수 없는 피로감이 항상 머리와 등허리를 휘감는다.
승가사 일주문 앞에는 대장균으로 인해 부적합 판정을 받은 약수터에서 물을 받기로 한다.
일행의 수통을 들고 혜숙과 동이가 줄을 서있다 물을 받는다.
뒤에서 기다리던 젊은부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쫄쫄 흐르는 적은 양의 약수가 수통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 뒤에서 하산 길에 물 한잔 마시려던 사람이 늘어선 물통을 보더니 애궂게도 일갈을 하고 하산로로 뛰어 내려간다.
수통의 크기는 500ml, 수통의 크기로 보아 먼저 물 한잔 마시자고 하기에도 애매하니 성질을 부린것이다.
때마침 불만스럽던 얼굴을 하고 있던 부부가 여기서 물통에 물을 채워가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차례를 기다리며 앞의 사람들의 수통에 물이 차기만을 군소리 없이 기다려왔는데,
성질 더러운 뒤에 사람들을 만나서 별소리를 다 듣는다. 한소리 안할 수 없다.
" 그 자식 우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어. 미친자식 산에 올 자격이 없는 놈이네,
큰 약수통도 아니고 작은병 하나에 인원수대로 받고 있었을 뿐인데."
네명 분의 물을 두명이 받고 있으니, 물을 보고도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성급한 마음에서 성질을 부린것이다.
문제는 밖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우리까지 그 줄에 서 있었다면 차례를 기다리지 않았을 사람이,
인원은 얼마 없는데 대기하고 있는 수통의 수가 사람보다 많으니 부당하다고 생각 했을지 모른다.
성질내고 내려간 사람은 그렇다 치고, 뒤에 있던 젊은부부가 괜히 그 분위기에 고무되어 열을 내며
양심운운하다 자초지종을 따져야 할 상황이 벌어지겠다.
이럴때는 상대방의 기세를 단숨에 꺽어버리는 것이 우선.
약수터에 선 줄 밖에 서있던 내가 뒤에 있는 젊은부부 들으라고 성질내며 내려간 밴댕이 속알딱지에게 한마디
" 이런 자식하고는 아 그럼 우리보다 앞서 내려와서 차례를 기다릴 것이지. 어따대고 성질이야. 되먹지 못하게."
사람수에 비해 왜 약수통이 더 많으냐며 따질듯 하던 젊은부부(싸가지가 없어 보였다)가 줄 밖의 지원세력의 거친 입담에
금방 꼬리를 내린다.
산에 와서 사소한 이유로 다른사람과 마찰을 일으킬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로 인해 마음 상해야 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대신 물을 받다 착한 심성 탓에 그대로 덤탱이를 쓰게 되는 꼴을 당하게 되면 내 부아가 참아내지 못한다.
길어야 작은 생수병 하나에 1~2분의 시간이 소요되고, 앞뒤 판단을 해보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할 뿐인데,
여자 둘이 4개의 수통에 물을 받고 있으니 속 사정을 모르면 아줌마들의 아전인수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내가 줄에 서 있었다면 밴댕이 속알딱지 같은 사내의 짜증 섞인 일갈도 듣지 않았을 것이고,
눈을 희번덕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젊은부부의 태도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작은 수통의 물을 채우는데 인원수대로 가서 서 있을 필요도 없었으니
우리 또한 공중도덕에서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성급한 오해에서 그런 취급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짧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지만 설명하자면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 나는데에는 그 방법이 가장 낫겠다 싶었다.
애초에 좀더 이해심있는 행동을 했었다면 그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뒷줄의 젋은부부는 그로 인해 마음 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업자득인 셈이다.
현란한 남방불교양식의 9층석탑.
세월이 흐르면 보물로 지정될지 모르겠지만, 고유의 화강암에 거칠게 새겨진 석탑에 비해 무게감이 없다.
승가사 코스를 찾은지는 십수년.
군 복무 시절 사모바위 옆에 있던 남장대 주둔지에서 근무한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산 길이 바빠 지나친 탓에 절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동종각이 있는 자리가 가장 조망권이 뛰어나다.
삼라만상을 깨어나게 하는 새벽 도량때의 동종소리가 멀리까지 울려퍼질것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두근거린다.
둥근 형태의 향로각 안에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49제를 지낸듯한 가족들끼리 영험한 약사전에 꼭 절하라는 얘기를 나눈다.
승가사 승가굴 안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조사상(祖師像). 보물 제1000호. 높이 불상 76cm, 광배 130cm. 승가굴은 삼국시대부 터 여러 승려들이 수도했던 석굴로 유명하며 그 안에 주존으로 안치되어 있는 상은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법을 전수하여 이름을 떨친 승가대사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광배 뒷면에 있는 명문에 의하면 1024년(현종 15)에 지광 등이 발원하여 승려 광유(光儒) 등이 만들었다고 한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는 등신대 크기의 좌상이나 대좌는 나중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넓은 편으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이마에 주름살까지 표현했으나 전체적으로 호분(胡粉)이 두꺼워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넓고 편평한 가슴 위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옷주름은 굵고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상체가 길고 유난히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는 점은 당시 고려 초기 철불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고 있으나 왼손은 소맷자락 속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는다. 광배는 상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으로 두광과 신광이 합쳐져 마치 배 모양을 이루고 있는 주형광배(舟形光背)이다. 두광 안에는 연화무늬를 새기고 그 주위에 당초무늬와 모란무늬를 돌렸으며 신광에는 당초무늬와 보상화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장자리에는 화염무늬를 부조했다. 이 상은 전체적인 비례감이나 세부표현, 옷주름의 처리 등에서 고려 초기 조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문에 의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초상조각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 브리테니커 발췌-
부처님의 광배를 따라 우천 시 빗물이 따라 흐르게 물길이 트여 있고,
바위의 홈은 부처님을 보호하기 위한 휘장을 치기 위한 장치가 있던 자리가 아닌가 싶다.
석조여래좌상에서 내려다 본 108계단.
혼자 슬랩과 밴드를 이용해 내려오는 등산객.
균형감각을 요구하는곳으로 고도감이 상당한데 용케도 잘 내려선다.
용혈, 용출, 나한봉과 그 뒤의 백운대
향로봉의 급준한 암릉.
뇌출혈 후유증으로 균형감각이 많이 떨어지는 국선배가 걱정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의 안부 자하문고개가 희뿌였다.
십수년을 다녔던 길에서 갑자기 겁을 먹어 다른 산행팀으로 부터 쓸데없는 소리를 듣게됐다.
이제 릿지 산행의 재미를 느껴가는 일이년차 아줌마들로
미쳤다느니 죽으려고 환장했다느니,
노파심의 정도를 지나쳐 잘난척을 해되는데 옆에서 들어 줄 수가 없다.
결국 나한테 한소리 듣고 입다물고 제 갈길들 갔다.
" 정선배, 다음 부터 산에서 품위를 잃지 않을께."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후배가 풀 죽은 한마디를 건넨다.
영화도 보고, 산행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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