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TRAIN/SOUL TRAIN

오대산 폭설 산행기.

오체투지해무 2012. 12. 6. 16:54

 

산행시기는 98년 1월 중순, 이 글을 쓴 시기는 99년 2월이다.

 

1월 12일

진부에 도착 19시 20분에 월정사까지 들어가는 막차를 타고 월정사 주차장에 내린 시각이 거의 20시 10분 정도 KBS 대형버스가 일단의 인원을 싣고 와 월정사에 내린다. 아마 무슨 연속극 촬영이 있는지 촬영전용차량도 그 뒤를 잇는다. 3일간의 식량을 담은 배낭은 무겁지는 않지만 월정사에서 오대산장까지 5키로의 평지길을 달도 없는 밤에 혼자 갈려고 하니 조금은 적적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82년 대학 2학년 여름 카시오 전자계산기를 전당포에 맡겨 받은 1만원으로 동해안 해수욕장을 섭렵하던 중 강원도 여행의 끝마무리를 오대산 비로봉에서 하고자 마지막으로 남은 친구 일승이와 이 길을 걸어 간 적이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열로 달구어질 때로 달구어진 황토길과 허파꽈리 하나 하나 마다 찌는 듯한 풀 냄새로 가득 채워질 것 같은 길을 걷다, 문득 일승이(현 상무농구팀 감독)가 배낭을 내려놓는다. 휴식을 취한지 채 10분도 안된 터에 나보다 건장한 이 친구가 벌써 쉬자고 한다. 날씨가 덥긴 더운가 보다 했더니, 갑자기 속이 안 좋다며 휴지를 챙겨들고 숲으로 접어든다.

 

작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 그 뒤를 숨죽여 쫓아갔다. 이윽고 적당한 장소를 발견한듯 자세를 잡고 일을 보기 시작 할 무렵 카메라 앵글을 맞추기 위해 풀숲을 헤치고 일어서는 나를 발견했지만, 때는 이미 돌이킬수 없게 치뤄지고 있었다.

 

적당한 장소에 고구마를 찌고 있던 중이라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한들 다른 곳으로 이동 할수는 없는 노릇이였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투석전으로 맞섰지만 어정쩡하게 앉은 자세에서 던지는 돌이 나를 맞출리 없다.

갖은 욕설과 애원을 했지만 난 이미 태양의 각도와 피사체의 적나라한 포즈를 머리 속에 넣고 촛점을 맞춰 셔터의 손을 옮겨가는 순간 일승이가 할수 있는 행동은 목을 두르고 있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그때 당시로선 가장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였다.

 

그 이후 여행 끝날때 까지 필름을 일승이에게서 보관하려는 노력은 마치 광주사태 사진을 담은 필름을 지키려는 보도사진기자의 노력에 버금 갔다. 그 한컷의 사진은 필름과 함게 극악무도한 일승이의 손에 의해 갈기 갈기 찟어졌지만 이십년이 다되어, 홀로이 눈 덮인 오대산길을 걷는 무료함을 달래주기엔 좋은 추억꺼리이다.

 

오대산장을 향하던 중 한대의 택시가 등산객을 꽉 채우고 내 앞을 질러간다.

21시 20분 쯤 오대산장에 도착하니 택시를 타고온 듯한 젊은 사람 4명이 일층 산장 한방에서 문을 빼꼭이 열며 나를 반긴다.

"걸음이 빠르시네요"

"예"

결코 빠른 걸음은 아니지만 먼저 택시를 타고 들어온 미안함에 건네는 말이다. 산을 많이 다닌 사람들은 아닌듯 하지만 젊은 얼굴에 겸연쩍기도 하고 반갑기도한 얼굴이 그지없이 정겹다.

 

 

 

이곳 오대산장은 국립공원 소유가 아니고 개인 소유이다. 산장비를 물으니 5,000원을 달라고 한다. 전기불과 수도를 쓸수 있기도 하고 IMF라서 산장비를 올려받지 않을수 없단다. IMF로 등산객의 주머니 사정도 1월달 강원도 산골을 휘도는 바람 못지 않은데......

 

2층 들어서니 혼자 온 등산객이 아래침상에 자리를 잡고 이미 식사를 한듯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고 있다 나를 반긴다. 늦은 시간이라 여러사람이 취침을 하고 있으면 좁은 산장에서 식사준비하느라 덜그덕 거리는것이 미안 할 것을 염려했는데 다행이다. 간단히 준비해온 삼겹살에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는데 한잔 같이 하고 취침에 든다.

 

1월 13일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지난 밤 잠을 좀 설쳤더니 아침을 해먹고 산장을 나선 시각이 10시 30분. 아랫층에서 어제 택시를 타고 묵었던 젊은 사람 4명이 먼저 출발한다며 인사를 한다. 이들도 상원사, 적멸보궁을 거쳐 비로봉 - 두로봉 - 동대산 - 노인봉 - 소금강 코스를 잡고 왔다는데 어째 장비들이 부실해 보인다.

 

늦은 출발이라 홍천면으로 넘어가는 차량 통제소가 있는 매점 앞에서 대학원생과 음료수를 사 나눠 마시고, 맞바로 북대사로 향하기 위해 대학원생과 잠시 작별을 한다. 아마 내가 걸음이 느려 비로봉에서 북대사 비포장으로 내려서는 길 쯤에서 만나게 될것이고 같이 두로봉 - 동대산 코스를 가자는 말을 건네고 홍천으로 넘어가는 비포장으로 들어선다.

 

 

구비 구비 오프로드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지프차를 이용 올랐었는지 길엔 오프로드 특유의 바퀴자국이 나 있다. 한데 이것이 발걸음을 내딛는 폭과 틀려 여간 신경쓰이는것이 아니다. 그래도 러셀이 안된 길 보다는 편하기 때문에 바퀴자국을 따라 올라가기는 하지만, 앉으면 눕고 싶어하는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늘은 그지없이 맑고 푸르기만 하다. 하늘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 하늘에 내가 빨려들어가는듯 하다. 비로봉에서 비포장으로 내려서는 곳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먹고 아직 대학원생이 지나가지 않은 것 같아 북대사쪽으로 13:30분 출발이란 글을 눈위에 스톡을 이용해 써 놓는다.

 

대학원생은 같이 가지 않았으면 한다. 등산화도 트랙킹용이고 침낭도 부실하고 침낭커버도 없다. 나 역시 비상시 비박할 요량으로 침낭커버만 갖고 오고 텐트를 안가져 온것이다. 비록 2인용 텐트이긴 하나 이젠 그 무게 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약해져서인가보다

 

그곳에서 북대사까지의 길은 눈 터널의 연속이다. 해가 중천이 넘었지만 비포장 도로 양옆의 나무들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것 같은 많은 양의 눈들을 뒤집어쓰고 나무들이 휘어져 있다. 혼자 가기 아까운 길이다. AF카메라로 찍어보긴 하지만 오토카메라의 특성상 이 풍경의 1/100도 담아내지 못할것이다. 아무길 한쪽 귀퉁이를 띠어내 집에서 잘 보이는곳 어디에 갖다 놓고 싶다.

 

북대사를 지나서는 누구의 발자국도 없다. 나무에 이고 있는 눈의 양이 많고 양쪽으로 나무가 우거진 곳을 가려면 전체적으로 푸른 빛을 띠면서 원근감이 없어진다. 일종의 white out현상인것이다.

그런 눈 터널을 지나 홍천군과 평창면을 가르는 면경계선에 다다르니 더 이상 전진할수가 없다. 바람이 잦아드는 곳에 눈이 차곡 차곡 쌓여있는데다, 그늘이 져 눈이 가슴을 넘는다. 표면이 크러스트 되었다곤 하지만 발을 디디면 허리까지 눈에 빠져든다. 두로봉으로 들어서는 출입문(작년까지 자연휴식년제이기 때문에 철조망과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다)은 자물쇠로 잠겨 있고 철조망을 돌아 고사목이 있는 곳에서 어렵사리 통과하고 나니 그 다음 부터 갈일이 걱정이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과 무릅까지 빠지는 눈과 허리까지 빠지는 눈위에서의 운동량의 차이점은 격어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한다.

양폭산장에서 화장실까지 평상시 오며 가는데 2~3분이 안걸린다. 하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폭설시엔 맨몸으로 1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하면 비적설기에 양폭산장을 가본 사람이라면 거짓말이라고 할것이다.

적설기 특히나 폭설이 내렸었을때의 보행속도는 인원수와 체력의 문제가 아니고 적설량에 따라 달라진다는것을 격어보지 못한 사람에겐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것이다.

 

설악산 서북릉, 등산지도상엔 8시간으로 표시되어 있는 길을 죽음과도 같은 3박4일 서북릉 종주란 글을 읽어본적도 있고, 실지로 97년초 산지 기자들의 동행취재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게제 된 적이 있으며, 올해 초 토왕에서 그 사고가 났을 때 산사랑 회원이기도 한 어떤 산꾼(이분의 오래된 글을 산사랑 자료실에서 대한 적이 있는데 산행에 대한 사색이 깊어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시카고에 있으면서 sangil.net이라는 산행기 사이트를 운영하던 최내현씨이다. 현재 딴지일보 편집장으로 있다) 공룡릉 5박6일의 산행기를 하이텔 산사랑 게시판이나 월간 "산"지를 통해 볼 수 있다. ( 이 산행기와 같은 시기에 격은 일이다. )

 

1,000미터 이상대의 폭설 시 산행은 산행 운에 따라서 히말라야 못지 않은 경험을 선사해준다. 이것이 경험으로 후일담을 전해 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올해엔 특히나 많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능선상이니 사람이 지나고 반나절만 지나거나 그 뒤로 눈이 오기라도 했다면(심한 바람이라도 불면 발자취는 분설로 앞,뒤 사람의 간격이 10미터만 떨어져도 지워진다) 금방 발자취가 사라지긴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엄연히 등산로상이므로 나무가지들이 헤쳐져 있을 텐데 어쩌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표지기는 무릅 높이이거나 허리 높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통상 등산로상 손을 뻗쳐 나무 위에 달아놓는것을 짐작하면 눈이 어느만큼 쌓여있는지 알수 있다.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날씨는 구름한점 없이 청명하다. 한시간여를 러셀을 하고 두로봉 쪽으로 향하지만 솔직히 어느게 길인지도 모른다. 뒤에 대학원생이나 아침에 오대산장에서 출발한 젊은사람들이 내 뒤를 따라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런 길에 그런 장비 상태라면 그들을 무모한 지경에 이끄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만에 하나 길을 잃고 헤맨다 해도 내가 갖고 있는 장비와 식량으로 적어도 산에서 이틀은 버틸수가 있다. 하지만 혼자서 오대산 능선에서 비박을 한다는건 자신 없기도 하거니와 의미를 찾을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의 속도로 진고개까진 적어도 2일이 걸릴것이고 텐트를 갖고 오지 않은 나로서 이틀 이상의 비박의 고통으로 내 몰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눈이 시린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날렸다. 이번 산행은 그저 편안한 오대산에 들어와 나를 느껴보자는 것이였지 이런 무모한 산행으로 나와의 힘겨운 대면을 하자는것은 아니였다. 불을 보듯 뻔한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분명 자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돌아가자.'

 

오버쟈켓에 스커트가 달려있지 않아 눈은 내 허리쯤에도 밀려올라오곤 했고, 눈 쌓인 높이 만큼 낮아진 나뭇가지는 내 키를 넘는 배낭을 잡아채기 일수였다.

 

'돌아가길 잘하는거야. 돌아가길 잘하는거야'

 

곤혹스러운 순간이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돌아서는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만만치 않은 크기의 배낭무게, 때론 배낭으로 인해 눈위에 떠있게 되는 두발로 차고 나갈 아무런 지지기반이 없을때는 힘도 필요없다는것 무기력하게 만들때 마다 몸에서 기가 빠져 나가는것 같다.

 

 

그렇게 또 한시간을 난리브르스를 치며 눈쌓인 능선길을 빠져나와야만 했다.다시 홍천군과 평창면 경계선에 와 닿았을때 온통 땀과 눈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배낭을 벗어놓고 간식을 먹고 담배 한대를 피워물고 저 너머 홍천군과 동대산 능선 넘어 노인봉쪽을 바라보고 미련없이 길을 돌아서 나오는데 아직까지도 해가 훤함에도 불구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깃털 구름과 빨려들어갈것 같은 시퍼런 하늘, 원근감 없이 거리측정을 둔감하게 만드는 이 길. 녹았던 눈들이 그세 빠득 빠득 소리를 내며 내 비브람에 와 닿는 소리며 두로봉 능선길이 자꾸 나를 유혹하는것 같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자꾸 이상한 느낌을 주어 머리가 쭈빗쭈빗 서게 만든다.

 

이런 느낌은 북대사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마치 이세상의 것, 눈에 익숙치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과 불안감이 겠지만

 

'왜 그렇게 느껴지지?'

비로봉에서 비포장으로 내려서는 길에서 조금 못 미쳐 등산로 금지표시를 보고 내려서면 몇굽이의 비포장길을 질러 내려오는 길이 있다. 저쪽 비로봉 능선을 조망하며 대학원생이나 젊은친구들도 이길을 벌써 지나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내려가다 몇미터를 주루룩 미끄러진다.

 

아이젠을 차기 귀찮아 스톡 하나로 의지해 내려오다 눈녹았던 물이 얼어 맨질 맨질한 빙판에서 잠깐 균형을 잃었던 것이다. 흙길이긴 하나 상당한 경사에 서 있을곳도 변변치 않은 곳에서 불안불안하게 12발 아이젠을 차고 내려오니 한결 편하다. 그렇게 아무생각없이 지프차 바퀴가 이어지는 비포장길을 내려 상원사갈림길 까지 내려서니 해가 어느새 지고 어둑 어둑해진다.

 

'잘했어. 돌아내려오길 잘했어.'

 

오대산장에 다시 돌아오니 주인은 뜨아하게 맞아준다.

 

"두로봉쪽으로 가다가 도저히 안되겠어 내려오는 길입니다."

"그쪽으로 올해 아무도 안갔을꺼에요"

 

산장주인은 산사람 같지 않다. 산장비 5,000원을 받는것도 자기네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아니여서 그렇단다. 하기사 몇년을 3,000원을 받았지만.

 

2층 침상에 짐을 내려놓고 내일은 맞바로 동대산으로 올라 소금강으로 하산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푸짐하게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어차피 하루치의 식량만 남겨놓으면 되니까.

 

식사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 대학원생이 젖은 등산화로 들어선다.

준비해둔 식사를 함께 마치고 여러 산에서 있었던 얘기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잠이 든다. 산장 유리창에 식사 준비를 하며 품어냈던 수증기들이 응결되어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월 14일

일찍 잔탓에 일찍 일어난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산장뒤 가마솥 뜨거운 물로 세수도 하고 8시쯤 산장을 나선다. 동대산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찾아가다 뭔가가 허전해서 생각해보니 아까 짐을 챙길때 헤드랜턴을 챙기지 않은것 같다. 겨울산에 들어오면 늘 헤드랜턴이 말썽을 빚어 IMF시대이긴 하나 더 오르기 전에 마련한다고 원정대용 내셔날 헤드랜턴을 구입했는데 그걸 산장 침상에 두고 온것이다.

 

배낭을 한쪽 길가에 세워두고 부지런히 돌아가 침상 한구석에 쳐박혀 있는 헤드랜턴을 찾아왔다.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야 하긴 하지만 리듐밧데리를 넣어 고가에 해당되는 장비라 속 쓰릴뻔했다.

 

월정사 비포장에서 동대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드니 대학원생과 눈에 띠게 차이가 난다. 체력도 변변치 못한데다 이것 저것 장비또한 만만치 않은 무게이기 때문이긴 하나 어제 러셀을 하면서 또 오른쪽 정갱이 바깥쪽 인대가 무리가 갔는지 송곳으로 쿡쿡 쑤시는게 보조를 맞췄다간 오히려 낭패가 되겠다. 진고개휴게소나 노인봉 산장에서 만나자고 하고 발걸음을 늦춘다.

 

조그마한 계곡길을 오르다 동대산에서 내려온 지능선상에 다다르니 조금씩 분설이 날린다. 어제, 오늘 날씨가 푹하더니 눈이 내리는 것이다.

 

땀 때문에 오버자켓 입는걸 질색을 하지만 날리는 눈이 금세 멎을것 같지 않아 자켓만 걸치고 오른쪽 무릅 인대를 걱정하며 느릿 느릿 동대산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날리는 눈에 의해 조망은 볼품없어졌다. 이쪽으로 오르며 계방산으로 뻗은 능선을 감상하고 싶었는데, 욕심것 되지 않는게 이번 산행인가 보다.

 

동대산 정상에 오르니 표지판 밑에 통과시간이 적혀있다. 나보다 꼭 한시간 빠르게 도착 한것이다. 배낭을 벗어놓고 동대산에서 두로봉쪽 능선으로 올라가 사방을 살펴봐도 눈때문에 아무것도 볼수가 없다. 산불감시초소가 있어 어렵사리 러셀을 해서 가보니 언제때인 쓰레기인지 널려있다. 그래도 이쯤 온다는 사람들이면 산에 제법 다닌 사람들일텐데 이게 뭔지.

 

서북릉 능선상에도 야영지 근처에는 여지없이 쓰레기더미들이 널려있다. 여럿이 다니면 가끔가다 쓰레기를 널려놓고 가는 팀들이 있다. 그들 중 한명만 챙겨도 깨끗해질수 있는 산인데 잔소리 하기도 귀찮고, 자기가 들고가기도 귀찮고 하니 그런 경우를 아주 가끔이지만 볼수 있다.

 

동대산에서 진고개까지는 한달음에 내려갔다. 초행길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이 내려 길위치를 제대로 확인하면서 가지는 못했지만 제대로 진고개도로로 내려섰다. 길에는 드문 드문 차량들이 쌓인 눈을 헤치고 조심 조심 운행하다 나를 발견하곤 반가움에 손을 흔든다.

 

진고개 휴게소엔 재작년인가 처음 들린적이 있었다. 아마 설악산 잠시 들렸다 이곳 저곳 주문진까지 유람삼아 다니다 넘어왔던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역시 진고개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고......

휴게소에 들어가니 몸이 훈훈해진다. 땀으로 젖은 오버쟈켓과 폴라텍티를 벗어 널어놓고 늦은 점심식사로 이것 저것을 챙겨먹고 있자니 휴게소 직원인듯 한 사람이

 

"동대산에서 넘어오셨죠?"

"예."

"동대산에서 넘어온 어떤 분이 폭설로 소금강쪽으로 못가겠다고 먼저 서울로 올라간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아마 일도 있고 눈도 오고 하니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가면서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나 보다, 이틀간의 산장침상에서 자면서 여러가지 얘기 재미나는 일이 있었다. 연락처를 교환하긴 했지만 언제나 산에서의 인연은 또 산에서 이어지기 마련.

 

PCS에 음성 녹음 기능을 확인 해보려 했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게 많고 어쩌다 음성사서함에 들어가도 자꾸 튀어나오게 된다.

 

대략 14시 30분 쯤 진고개 휴게소를 출발 매표소가 눈에 띄어 표 끊으라고 할까봐 돌아가려고 했지만, 러셀이 그길로 나 있어 어쭐수 없이 매표소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사람은 없고 간단한 메모가 적혀있다.

 

' 5~20센티 폭설 예보로 임시 등산로 폐쇄 '

 

5~20센티 온다고 널널한 노인봉까지의 등산로를 폐쇄하다니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 고스톱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보다고 생각하곤 진고개산장을 좌측으로 돌아 스키장 같은 구릉지로 돌아선다. 왠 썰매장을 만들어 놓을려고 이렇게 휑덩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랭지채소밭이란다.

 

'가루눈' 산에서의 눈은 포근히 내리는 법이 없다 사선으로 온다. 하나 배낭커버와 오버자켓에 사그락 거리며 내리는 소리와 거친 내 숨소리가 이세상 소리의 다인것 같다. 첫번째 구릉에 올라서니 저 밑에 진고개 휴게소와 설원이 펼쳐지다 끝난 부분에 숲이 시작되고 중간 중간에 도로경계측량할때 세워 놓은 것 같은 노란천이 묶여져 있는 대나무가 세워져 있다.

 

사그락 거리던 눈이 눈보라로 바뀌면서 사선으로 비켜 몰아치고 금방 숲이 시작되는 부분이 시야에서 사라지는듯 싶더니 구릉지 중간 중간에 세워진 대나무 표식도 사라진다. 잠깐 사이에 말로만 듣던 'white out'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보아둔 방향이 있고 러셀된 발자취를 따라 숲이 시작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뒤를 돌아보니 가까운 곳은 하얗게 보이지만 먼곳은 암회색으로 보인다. 초행길이긴 하지만 노인봉 산장까지 지도상 2시간의 길은 가볼만한 거리다 싶었다.

 

10여분을 올라가니 안내산악회인지 비슷한 연배의 50대남자분들이 뛰어 내려오다 싶이 내려오는데 4~50명 되는 인원이 배낭도 없고 술냄세가 진동을 한다. 저런 복장으로 노인봉 정상을 오르내렸다면 이 정도의 눈이라도 길 잃을 염려는 없겠다 싶다.

 

"햐 그놈의 새끼 그거 왠 욕을 그렇게 해대. 몇살 먹어 보여"

"나이는 꽤 되었겠던데"

"아, 나이가 들어도 그렇지."

 

하산하던 등산객들이 산장지기에 대해 얘기 하는것 같다.

노인봉 산장지기인 성양수씨는 욕쟁이로 유명하다. 아마 그 사람 얘기를 하고 있는것 같다.

숲속에 들어오고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편 사면으로 올라가다 보니 바람도 잦아들고 나무에 가려지긴 하지만 시야도 4~50미터 정도 확보됐다. 특이한 것이 아까 설원에 드문 드문 있던 스키자국이 여기에도 지그재그로 선명하게 나있고 하강을 했다기 보다 급경사를 스키로 올라간것 같이 보인다. 지지난 해 2월 희운각산장에서 지리산 연하천산장 노시철씨를 만나 한국산악스키에서 가야동 스키등반훈련을 왔다고 했었는데 올해를 이곳으로 훈련지를 정했나 싶지만, 스키자국이 아무리 많아야 2~3개를 넘지 않는다.

 

약간의 급경사이던 길이 능선 사면으로 붙으면서 경사도 많이 눕고 귓전엔 다시 오버자켓에 붙딪히는 싸라기눈 소리와 거친 내 숨소리만 들린다. 오른쪽 무릅 인대가 쿡쿡 쑤셔 조금 걸음을 늦추며 걷는다. 담배도 한대 피워 물고. 사그락 거리는 눈발이 많은것 같지 않으면서 도무지 그칠줄을 모른다.

 

겨울산에 들어와서 눈한번 못맞아보고 가는것도 3대까지는 아니겠지만, 자기대에선 덕을 덜 쌓은게 아닐까 혼자 생각하면서 마냥 내리는 분설을 맞으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1시간여를 오르니 노인봉과 산장 갈림길 표지판이 키 높이에 있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노인봉 정상에 오르기 보담 산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산장쪽으로 우회하기를 잘했다. 정상쪽은 꾸준히 오름길일텐데 이쪽길은 횡단하는 길이라 높낮이가 별로 없어 걸음을 옮기는데 수월하다. 몇번 오른쪽에 나무 목책이 세워져 있는데 눈사태나 산사태를 에방하는 것인지, 지난번 산지에서 봤을땐 동행기자들의 허리 위쯤 올라와 있는 목책 상단이 무릅이나 발목쯤 와서 걸린다. 그세 눈이 많이 쌓였다는 것이다.

 

침엽수림의 제법 굵은 가지들이 머리와 배낭 헤드를 잡아챈다. 기존 등산로 임으로 가지치기가 충분히 되어 있음에도 적설량으로 나무가지에 신체가 닿는것이다.

 

'올해도 눈은 願없이 밟아보는구나.'

 

흡족히 생각하며 올랐다. 나중엔 이 눈때문에 怨이 생겼지만...

길을 잘못 들었는지 평탄한 안부에 들어서면서 길을 잃고 말았다. 왼쪽으론 완만한 오름의 경사면이고 오른쪽은 그저 평평한 안부이다. 어느쪽이 산장인지 가늠할수가 없다. 산장의 입지 조건상 이곳 보다는 좀더 내려서야 할텐데 도대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하얀 눈과 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나무의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흑백사진이 라이프잡지에서 노르망디상륙작전 중 흔들리는 카메라로 잡은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폭설이 내리는 산은 흑백사진이다.

 

분명 다져진 곳이 있을텐데 발은 가랭이 까지 허리까지 빠져든다. 10걸음 옮기기가 완전군장으로 가파른 산악구보에서 발을 띄우기 보다 더 힘들다.

소금강쪽으로 내려서는 듯한 곳으로 50여미터를 옮기니 좌측으로 산장 지붕이 보인다. 안도의 한숨과 어느덧 편안한 안식처로 접어든듯 발걸음이 가벼워 진다. 화장실까지 눈을 치워 놓은 길이 보이고 50미터 나아가니 작지만 단단하게 지어놓은 산장과 산장을 화려하게 장식해 놓은 온통 눈얼음을 뒤집어쓴 산장 높이의 측백나무(?)가 정취를 더해준다.

 

상고대, 설화, 빙화 많은 것을 봤지만 마치 나무에 물을 꾸준히 뿌려 두텁게 얼려놓기라도 한듯 나무 전체를 에워싼 눈얼음은 나를 일순간 스칸디나비아의 순록이 자라는 그런 곳으로 옮겨놓아준 느낌이다. 어떤 미사여구를 쏟아 놓아도 산장의 수문장 같이 양옆으로 우뚝 솟은 아름다운 나무의 자태를 설명할수가 없다.

 

계단에 배낭을 내려놓고 산장 문고리를 돌리는데 잠겨있다.순간 낭패감이 든다. 안에선 인기척이라곤 없고, 문은 열리지 않고 이 폭설에 산장지기는 내려간것일까? 아니 일을 보러 가도 그렇치 산장 문을 잠가놓고 가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계단을 내려와 눈길이 치워진 우측길로 들어가니 에스키모이글루 같은 눈으로 만든 키높이의 눈담장과 이글루 입구 같은 문이 되어 있는데 기어가지 않고선 집안 마당으로 들어갈수가 없다. 높은 포복 자세로 마당으로 들어가자 산지에서 산장지기와 동행기자들이 찍은 바로 그집이다. 매점인듯한 들닫이 창문은 굳게 잠겨 있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앞엔 개가 으르릉 거리는데 그렇게 사납지는 않은듯 하지만 경계심으로 이빨을 들어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화전민 집에서 풍기는 냄새와 문 입구에 상당히 눈이 많이 쌓여 있는것으로 보아 금방 자리를 비운것 같지 않다.

 

낭패다 산장은 잠겨있고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있을수는 없고, 날씨는 그렇게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지만 완전히 어두워 지기전 식사준비도 해 놔야하는데, 산장 계단에서 담배 한대를 피워 물고 서 있자니 산장 아래쪽에서 식수통지게를 지고 설피를 신고 이외수같은 사람이 올라오는데

 

"누구요?"

 

하는 폼이 마치 주인도 없는 집에 왠 객이냐 하는 어찌 보면 가당치 않은 위엄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고 하루 잠이나 묵어가면 된다. 이러니 저러니 산에 대해서 떠들고 싶지도 않고 산장지기 특유의 잔소리 들을 이유나 행동도 없다.

 

"하루 묵어가려고 합니다."

"거기 기다리시오. 통 놓고 올께."

 

문을 따주고 들어선 산장은 작고 아늑하며 여기 저기 틈새로 눈가루가 날려 들어오긴 했지만 정감이 넘쳐나는 그런 곳이였다. 적어도 이 시간 이후론 등산객이 올라오지 않을 것이며 숙박부와 숙박비를 계산하면 산장지기와 마주칠 필요도 없어진다.

 

식수를 뜨기 위해 보온병과 음료수통을 들고 샘터로 내려서는 순간

 

'어, 이게 아닌데.'

 

눈을 걷어놓은 길에서 두세발을 옮기는데 눈은 가슴까지 차고 목까지 찬다. 더구나 내리막 길에서 다져지지 않은 눈은 발목을 잡아놓고 상체만 앞으로 내리 꽂게 한다. 산장 앞에서 20여미터를 갔을까 도저히 물을 뜨고 올라올 자신이 없다. 잠시지만 샘터까지 갔다 오면 밥할 기운도 없어지겠다.

 

조금 올라서다 눈에 파묻히고 내려섰던 20미터를 올라서는데 양손에 들은 그릇과 수통으로 행동은 부자유스럽고 숨이 턱에 차 목에선 쇳네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긴장이 풀어진 탓에 맥없이 내려섰던 눈길이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다.

 

산장지기는 20리터의 수통을 들고 한발 한발 올라오지 않았는가. 내가 잘못봤나 싶을 정도다. 산장 주변에 눈을 녹여 아침때 밥까지 하고 인스턴트 육계장을 하나 올려 놓았다. 산장지기가 숙박부를 들고 올라와 몇가지 주의사항과 잔소리를 한다. '예,예' 고분 고분 말을 들어주고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하니 저녁 준비 해놨다면서 숙소로 돌아간다.

 

 

이제 이 공간은 내 공간이다. 저렇게 사그락 내리는 눈도 아침이면 깨끗이 게일테고, 동해안의 그 파란바다에서 구름 한점 없는 일출을 볼것이다. 어제와 그제 짧은 경제 지식으로 경영학과 대학원생과 한국경제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체 진단하려고 머리를 쥐어짤 필요도 없고, 나와 하등에 관계없는 산업 전반적인 것에 대해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고, 친교를 위한 과음으로 이튼날 숙취도 없을 것이다.

 

실내 온도계는 영하 7도를 가르키고 있다. 새벽에 5~6도 쯤 더 내려갈것이다. 이런 곳에선 바닥과 닿는 부분이 더 차갑다. 두로봉 능선상에서 비박할 작정으로 가져온 여분의 메트리스가 위력을 발휘한다. 겨울용 1600그램짜리 거위털 침낭은 영하 20도 이하의 서북에서도 위력을 발휘했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로 밤새 뒤척인 지난해 서북에서의 비박으로 짐이 되도 메트리스 한장 더 가져오길 잘했다.

 

내일 아침이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동해바다로 세수를 하고 노인봉에 올라가 세상을 굽어보고 힘든 등반만큼 편한 하산길에 접어들것이며, 약간의 러셀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올라오는데 2시간여가 걸렸으나 하산길에 아무리 눈이 쌓여도 기존의 러셀이 되어있으니 염려할바는 아니였다. 비록 지방 방송이지만 어렵사리 라디오 채널을 맞춰 잠시 듣다. 10시쯤 취침했다.

 

 

1월 15일

건강한 남자들은 알것이다. 산에서의 아침은 일상의 아침 보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 뿌듯함과 추운곳에서의 숙면은 방광의 압박감으로 이른 아침을 맞게 되다는 것을. 산장 중앙부 침상과 침상 사이의 바닥엔 밤새 창문과 문틈으로 들어온 적설량이 삽으로 걷어치워야 할 만큼 많다. 어제의 기대와 다르게 흐려 있는 것이다. 바깥에 쌓인 눈으로 문을 여는데 애를 먹었다.

 

어제 오후부터 밤새 내리고도 눈발은 전혀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강한 바람까지 동반하고 있어 화장실 넘어 안부까지의 공제선도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이곳에선 뜨거운 국물로 속을 채우는것이 체온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어제 해놓은 밥과 국은 간밤의 추위로 꽝꽝 얼어 붙어 개밥그릇을 연상케 한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코코아 한잔으로 몸에 온기를 되찾자는 생각에서 물을 끓여 코코아 한잔으로 추운 속을 달랜다.

 

산장 문을 열고 보니 성양수씨가 매점과 산장, 화장실을 오가는 길을 치우고 있다. 바쁜것이 없는 나로써 눈치우는 일을 안거둘수 없다. 헌데 이 눈이 장난이 아니다.

 

눈을 치워 보긴 군대생활 이등병 이후 처음이다.

프라스틱 눈삽으로 한참이나 땀을 흘리며 매점에서 화장실까지의 길을 처내니까 얼굴에서 송글 송글 땀이 맺친다. 해장 운동 한번 멋있게 했다. 화장실 가는 길은 쌓인 눈이 키를 넘는다. 들어가서 늦은 아침을 하려는데 치우던 김에 매점앞 마당의 눈도 치우자는 것이다. 어차피 이눈을 뚫고 혼자 하산은 하지 못할것이고 자기가 스키로 러셀을 해주면 한층 걷기 편하거니와 자칫 길을 잘못들어 낭패 보는 일도 없을것 이란다.

 

오랫만에 눈도 치우고 눈담장도 만들고, 초행의 산행길이요 자칫 안개자니 계곡으로 빠진다거나 속새골로 빠지면 조난으로 이어질것이 뻔한지라 시간이 지체되도 산장지기의 도움을 얻어 내려가는 것이 안전할것이다.

 

매점앞 10평도 안되는 눈을 치우는데 눈높이던 눈담장이 키를 넘어 삽을 치켜 들어야 눈을 올릴수가 있다. 옆으로 휙휙 쳐 올리던 눈치우는 작업과 달리 허리를 연신 구부렸다 펴야 하는것이 장난이 아니다. 산장지기는 숨소리 한번 내지 않고 꾸준히 퍼올리는데, 나는 허리뒤쪽 근육에 경련이 나고, 대퇴근이 뻐근해져 온다.

 

'길잡이 비용 한번 톡톡히 치루는구만.'

 

2시간여의 작업 끝에 마무리를 하고 산장지기는 아침 식사를 하고 올테니 그동안 장비를 챙기란다.

 

산장 매점에서 컵라면과 초코파이 두개로 아침을 때우고 산장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아솔로 프라스틱화와 로시뇰스키를 들고 산장안으로 들어오는데 손엔 설피가 들려져 있다. 스키로 러셀을 하면 그뒤를 따라 설피를 신고 오면 한결 편할것이란다.

 

어제 산장에 도착, 샘터에서 20리터의 수통을 힘 하나 안들이고 목까지 빠지는 그 길을 올라오게 해준것이 테니스 라켓 모양으로 생긴 설피란 것인데, 고로쇠나무를 물에 삶아 만들었다는 설피는 군용 삐삐선으로 등산화에 결속하게 되어 있다. 처음 하다 보니 어떻게 신는지 감을 잡을수가 없다. 얽히설히 대충 맸다가 눈밭에서 풀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수 없을 것 같아 동여맨다고 맸는데 성양수씨 보기엔 갑갑했나 보다.

 

"어이 앞에 코부터 해서 뒤축에 묶고 ......, 어이 답답하긴."

"허허 하라는대로 하란 말이야 하라는 데로."

 

구부리고 앉아 시키데로 하는것 같은데 하는 본인도 갑갑하게 잘 안된다. 보고 있던 성양수씨가 급기야

 

"야, 잘하란 말이야. 말귀를 못알아 들어 어쩌구 저쩌구 ."

 

야자로 나가는 폼이 알려줄려면 옆에서 소상히 알려주던가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소리만 빽빽 지르는게 상당히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또 한번 성질을 부리는 때를 못참고 한마디 쏘아붙히지 않을수 없었다.

 

" 처음 하는게 그렇지 잘 설명도 못해주면서 야자요 야자가."

"뭐 뭐야. 너 몇살 먹었는데?"

 

급기야 감정싸움이 되고 조용할땐 유순해 보이지만 다혈질적인 면이 많아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성질을 풀고 봐야 한다.

 

"거 듣자 하니 반말에 쌍소리까지, 이 양반이 어따데고 성질을 부려. 내 나이 37이요. 어디가서 야자 들을 나이는 아니란 말이요."

 

산장안엔 그 주위의 차가운 공기 보다 더 차가운 냉기류가 흐르고, 둘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나 하는 잠깐의 틈이 생겼다.

 

"내 나이 47이다. 10살 위면 그럴만도 하지."

 

전혀 수그러 들지 않는다. 나도 그정도의 반격으로 수그러들꺼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43인가 44인걸로 알고 있는데 몇살 올려 말한다. 산행경력으로 따지면 한참 선배이고 나이로 보아도 대접을 해드리고 싶지만 이런식의 무례함은 견딜수 없는것이다. 나이와 경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인간관계에서의 도리에 관한 문제이다. 도리에 어긋나게 나가는데야 도리가 없다.

 

"47이면 47이지. 57먹은 등산객이 당신한테 막대하면 당신은 가만 참고 있을수 있어."

 

울컥 치미는 화에 나 또한 말이 막 나간다.

잠시 당황한 기색이 보이다 불끈 두리번 거리는 폼이 주위에 피켈이라도 있으면 찍어버릴 것 같은 태세이다. 완력으로야 그분을 이기기야 하겠지만 나도 그렇게 까지 하고 싶지 않다. 간혹 산장에서의 웃지못할 해프닝은 이렇게 벌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고, 누가 보아도 둘다 욕들을 행동인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까지 되리라곤 둘다 예상 못했을 것이다. 상대방의 의중을 냉정히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자기딴에도 도와주려던 것이였고, 산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그런식으로 대하던 것이 내 비위를 거스렸던 것이다. 도움을 받는 것은 내 입장이고, 나 또한 그사람의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였기에

 

"처음 설피를 신어보는 사람이 어떻게 잘하겠습니까. 대충 묶고 가다 눈밭에서 고생을 할것 같으니 큰소리만 치지 마시고 자세히 알려주십시요."

 

라고 하니 잠시 안색을 살피더니 이쯤 접어두어야 겠다는 듯 한쪽은 자기 손으로 직접 묶어준다. 잠시의 감정대립으로 극단으로 치달을 뻔 했지만 대화의 길을 터놓으면 감정이란 손에 쥐어든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성양수씨의 도움으로 등산화에 설피를 단단히 고정하고 배낭을 메고 산장을 나서는데 벌써 저 앞을 앞서 간다. 산악스키는 일반스키와 달리 바인딩 뒤축이 착탈식으로 들려 경사면을 헤치고 올라가기 쉽게 되어 있으며 스네이크스킨이란 것이 붙어 있어 뒤로 밀리지 않게 되어 있다.

 

눈발은 전혀 잦아들줄을 모른다. 테니스라켓보다 두배 쯤 큰 설피로 인해 걸음을 옮길때는 반타원형을 그리며 스키자국을 쫒아간다. 하늘은 꼬박이 24시간 가루눈을 퍼붇고 있었다.

 

스키는 10~15cm 쯤 파묻히지만 설피를 신고 배낭을 맨 나는 무릅까지 빠지고 체중을 옮기려면 거기서 조금 더 내려 앉는다. 어제도 깊은 곳은 허리까지 빠졌으니 밤사이 자중에 의해 가라앉았다 하더라도 신설의 양이 워낙이 많아 올라오며 다져 놓은 러셀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노인봉 정상과 진고개쪽 갈림길위 나무가지들은 어제 보다 한츰 더 낮아 보였다. 눈을 뜰수 없는 강풍이 몰아쳤지만 새삼 짐을 내려놓고 고글을 착용하기에도 번거롭다. 안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성양수씨에게 숨을 몰아쉬며

 

"먼저 내려가십시요. 오른쪽 무릅인대가 안좋아 상당히 느릴겁니다. 만약에 지쳐 중간에 포기 하게 되면 산장에 가 있을테니 염려 마시고 일 보시고 오십시요."

"안내산악회에서 사람들이 온다고 했으니까 길은 내놔야 하고 무리 하지 말고 스키자국만 따라오게."

 

말을 남기고 벌써 시야에서 사라진다. 체력도 워낙이 뛰어나지만 눈위에서의 스키 위력을 처음 깨닫게 된것이다. 용평이나 무주의 얼마 안되는 자연설 코스보담, 빙판 같은 인공설이 대부분인 스키장과 어찌 비교할까. 캐나다의 블랙콤스키장이란 곳은 샴페인파우더라고 해서 눈을 들어 입으로 후 불면 날리는 눈을 최고로 친다는데, 이런 눈이 적설기중 몇날이나 될까 바로 그런 눈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도 잠시

 

'사박 사박 소복 소복, 소복 소복 수북 수북 하늘에서 흰꽃가루 떨어지네.'

'사박 사박 소복 소복, 소복 소복 수북 수북 하늘에서 흰꽃가루 떨어지네.'

 

머리에선 아무 생각 없어지고 숨고르기와 예전에 눈에 대해 노래했던 대목을 떠올리며 종교의 경구처럼 계속 되뇌이며 걸음을 옮긴다. 스키 내려간지가 얼마나 됐다고 부분 부분 휘날리는 풍설로 인해 스키자국이 파묻힌 곳도 있다. 진행방향 좌측 안개자니나 우측 속세골로 빠지면 조난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사~박 사~박 소~복 소~복 수~북 수~북 하아느을에서 희인꽃~가루~ 떨어지네.'

 

노래에 맞춰 발걸음이 옮겨지던 것이, 노래가 느려진 발걸음으로 맞춰진다.

 

30분여를 왔을까 하산길이니까 진고개에서 노인봉 산장 방향으로 갈림길 표지판이 보일때도 됐는데 첫번째 목책도 지나치지 않았다.

 

오른쪽 인대가 또 말썽이다. 뜨끔 뜨끔을 지나 한발 한발 마다 쑤시기 시작하는데 온길이 아까워 되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50 걸음 걷고 숨을 몰아쉬자고 작정을 하지만 서른도 쉬기 전에 지쳐서 서있다 가곤 한다. 폴이 하나만 있는것이 아쉽다. 한조를 살까 하다 요란 떠는것 같아 안샀는데 폴하나가 그렇게 유용할수가 없다.

 

그렇게 걷기를 2시간반 만에 노인봉에서 진고개쪽으로 내려선 능선과 만났다. 이쯤 어디 표지판이 있었는데 하며 찾아보았지만 눈에 파묻혔는지 찾을수가 없다. 아예 스키자국이 없어진곳이 점점 늘어난다. 바람이 좀 잦아드는 곳엔 차곡 차곡 눈이 쌓여 금방 자취를 감춰 리본도 찾아볼수가 없고 이러다 길을 잃는게 아닌가 걱정이다.

 

내리막길이라 수월하긴 하지만 무릅인대의 아픔과 어지러울 정도의 허기가 져 꼼짝하지도 못하겠다. 배낭을 벗어놓고 잠시 생각을 해봤다. 이 속도라면 진고개엔 저녁때 다되서 도착할테고 거기서 비박 한다는것도 만만치 않을테고 꾀가 나기 시작한다. 만에 하나 스키자국을 놓쳐 이 체력으로 계곡쪽으로 내려서기라도 한다면... 끔직하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왔던 발자취가 없어지기 전 산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난을 대비해 비박을 한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체력은 남겨 두어야 한다. 더구나 혼자서 이미 탈진한 상태에서의 비박은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게 되고 사망으로 이어진다. 설산이나 우중산행시 조난사의 대부분이 조급한 마음에서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판단력을 상실, 체력을 다 할때까지 소모하여 체온유지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완만한 오름길이지만 한발 한발이 고통의 연속이다. 폴 하나에 의지해 발을 옮기기가 이렇게 힘들줄이야. 하산 하면 꼭 하나 더 구입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렇게 마냥 느린 걸음으로 산장으로 돌아왔다. 오버복 안으로 온통 땀이 흐르고 고어텍스 장갑 속도 땀으로 가득 찼다. 산장 바닥에 배낭을 벗어 놓으니 떨어지는 눈이 한짐이다.

 

산장에 돌아오긴 했는데 식량이라곤 꽝꽝 얼은 밥한덩이와 국이 전부다. 2박3일 예정에 오대산장에서 선심을 쓴탓에 휘발유도 주부식도 바닥이 났다. 몇번이 될지 모를 물을 끊일수 있는 휘발유가 문제다. 간단히 물을 끓여 육포와 편강, 건포도로 허기를 달래고 마음을 진정 시킨다.

 

오후가 훨씬 넘어도 눈은 그칠 기미를 안보인다. 눈이 그치지 않는 다면 언제 하산하게 될지 모른다. 밥과 국은 하산할때 아침으로 하기로 하고 저녁때는 야채죽으로 속을 덥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침낭과 메트리스를 침상 바닥에 깔고 들어 앉으니 피곤이 엄숙해 온다. 피곤하다고 낮잠을 잤다간 불면의 긴긴밤을 지새울것 같아 산장 베치카 위에 올려진 산악잡지를 읽는다. 가만이 있으니 자꾸 졸음이 와 라디오 볼륨을 높히고 춤을 춘다.

 

무슨음악에 맞춰 춤을 췄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큼직한 비브람에 헐렁한 오버복이 힙합패션이고 발도 시려 힙합을 춰보기로 한다. 홍대앞 락카페에 갔을때 20대 초반 애들이 추는 힙합춤을 흉내내 보려 하지만 잘 안된다. 그들의 춤은 마구 솓아오르는 힘을 밖으로 분출하기 위해 쭉쭉 뻗어올라가는 것이 마치 스프링이 튀어 오르는 것 같다. 머릿속에 그들의 춤 동작을 떠올리며 흉내 내 보지만 자꾸 관광버스춤이 되어 보이는걸 느끼곤 나이란 할수 없는건가 보다.

 

술한잔 안마시고 추는 춤이지만 율동을 크게 움직이니 흥도 나고 몸도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춤 모양도 나아지는것 같다. 열심히 힙합이랍시고 추다 누군가가 보고 있으면 얼마나 웃낄까 생각을 해보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눈보라 속에서 다리를 절며 갈팡질팡하다 지금은 이렇게 되도 안되는 춤을 추고 있다는것 때문에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안내산악회에서 올라온다면 푸짐한 저녁도 먹을수 있을지 모른다. 하산할땐 그들의 도움을 받을수도 있을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침낭안으로 기어 들어가 라디오를 듣는데 온통 우울한 소식 뿐이다.

 

IMF로 실직한 가장들이 가정을 버려 소년, 소녀가장이 늘어난다는것과 강릉시에선 시 예산을 보조해 기름보일러에서 연탄 보일러로 교체해주는 돈을 빌려주며 이에 따라 신청자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정말 우울해 진다. 6~7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니. 정치현실 마저 그때의 암울함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근로조건 또한 그때로 돌아가게 될것이고 부도와 정리해고로 이어지는 암울한 미래를 엿보는것 같아 우울해진다. 조난이라면 조난일 이 상황이 그런 생각을 만들게 됐는지도 모른다며 생각을 떨쳐 버리지만 불을 보듯 빤한 가까운 미래 아닌가.

 

철저히 혼자 된 이시간을 나만을 위해 보내자. 세속에서 멀어지고자 이곳에 온것인가, 세속에서의 나의 행동 반경을 볼수 있는 거리 만큼 떨어지고자 이곳에 있게 된것일까. 작년 한해를 죽도 못 쑤다가 연말에 아파트 부대토목공사로 다소간에 숨통이 터졌지만, 추후 사업 주체가 화의 신청들어가 98년 사업추진이 불투명해졌다. 2월에 설계가 끝나고 견적이 들어가 3월이면 삽질이 시작 되어야 할텐데 화의신청이 언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고 그 상태에서의 자체 사업 추진 또한 불투명한것이다. 주체도 객체도 아무도 모른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길을 찾지 못할때 이렇게 산에 들어와 있으면 안개가 걷혀 나가듯 길이 보이기도 하고 일종의 선몽을 꾸기도 한다. 희망에 대한 강한 갈구가 꿈이나 의식을 바꿔 놓은 것이 겠지만 산에 들어와 있으면 겉치레를 벗고 발가벗은 내 모습으로 내 앞에 설수 있다.

 

한계점에 달한 심폐기능과 근육을 체험할때면 손안에 잡히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홀로 된 시간이라면 이런 것들과 대면하고 싶다.

 

일 앞에, 여자 앞에, 내가 살아가야 할 나날들 앞에, 발가벗고도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내 모습을 찾는다.

발가벗은 모습이 당당해야 진정 당당할수 있는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당당해 보이기 위해 겉치레를 꾸민다.

 

키를 넘는 적설량을 헤치고 나가려면 평소에 쌓은 체력이 있어야 했다. 그래야 당당하게 헤치고 하산할수 있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어야 그 상황에서 허기나 현기증이 나지 않았다. 그래야 당당하게 눈을 헤치고 하산할수 있었다.오후의 화두는 당당이다.

 

'당다라당당 당당. 다라다라당당 당당.'

 

5시나 됐을까 인기척이 나는 듯해 산장 문을 열고 보니 성양수씨가 어느새 왔는지 눈을 치우고있다. 참으로 부지런하다. 두말하지 않고 나와 일을 거두는데 등산화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산행경력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묻는다. 며칠을 두고 왁스를 먹인 중등산화가 눈에 쓸려 물광 나듯이 반짝인게 인상적이 였나 보다.

 

"원 그지 같은 놈들이 겨울산에 들어오면서 덕지 덕지 걸레 같은 등산화를 신고 와서 지리산 종주를 몇번, 백두대간이 어떻고 하면 같지 않아. 이름이 뭐여?"

 

그제서야 통성명을 하고 이번이 노인봉엔 처음이지만 성양수씨에 대해서 익히 들어 알고있었다. 오전에 제가 좀 심했다라고 하니

 

"예전 같았으면 내 그림자도 못밟았어. 그래 나보고 뭐래. 욕쟁이래지."

 

산장지기 중에서 가장 괴팍한 사람이라면 노인봉의 성양수씨다. 하지만 자기 나이 만큼 자기를 안다.

 

"이곳은 내 왕국이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절대 인수하지 못하지. 겨우내 오늘 같은데 직원이 여기 상주할수 있어. 절대 없어. 저 앞에 동해바다, 소황병산, 여름에 떠오르는 일출 다 내꺼야."

 

이렇게 시작된 그의 얘기는 한번 마음을 터놓기 시작하니 쉴줄을 모른다. 어느땐 신파극의 배우처럼 성대묘사를 하기도 하고, 산장에 찾아와 도도하게 구는 등산객을 혼 내주는 일, 최초 동계단독 태백산맥 종주얘기, 한라산에서의 조난, 96년 공비 출몰로 한해 장사를 망쳤던 일. 산장엔 사업자 등록증이 없어 손해는 인정되지만 요건이 되지 않아 보상금을 못탔다는데 대해 공분을 느꼈다. 저녁때까지 할일이 없어 느긋하게 서두르면서 풀어 놓는 얘기 보따리 마다 재미있다. 어둑 어둑 해져 일손을 멈추고 각자 저녁식사를 위해 숙소로 들어갔다.

 

야채죽 반봉지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침낭에 자리한다. 하루 운동량에 비해 턱도 없이 모자란 식사량이지만 위장도 비상시국을 아는지 그것만으로 도 만족한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한기가 상당하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뭔가를 끄적이려 해도 손이 곱고 볼펜잉크가 얼어 잘 되지 않는다. 짐이 될것 같아 다나파카를 가져 오지 않은게 상당히 아쉽다.

 

쑥찜팩 하나를 발열시켜 오른쪽 무릅 인대에 갖다 대고 마사지를 해주는데 하산해서도 아플까봐 은근히 걱정이 된다. 4일째 된 침낭은 이제 습기로 눅눅해져 찬기가 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금 기억 나는것은 없고 산장 베치카 위에 놓인 구급함에 쓸만한 약품이 하나 없어 다음에 이곳을 찾게 되면 몇가지 상비약이라도 놓고 가야 되겠단 기약을 해보곤 언제 잠든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1월 16일

시장기와 한기로 아침을 깨운다. 간밤에 어떤 꿈을 꾼것 같은데 일어나는 순간 다 잊어버렸다. 산장의 작은 창밖은 어제 보다 한층 밝아 날이 게일 기세이다. 동해바다 해안 쪽은 옅으나마 햇살도 드리워져 있다. 군사기지가 있는 소황병산에서 이쪽 능선까지는 흑백사진이지만 저 멀리 주문진 해안쪽은 푸른 바다와 하얗게 눈이 덮힌 육지가 눈에 선연하다. 노인봉에 올라온지 3일 만에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어제 보다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제설작업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적설량도 적고 익숙해진 작업으로 1시간도 안돼 산장 주변과 화장실까지의 눈을 치웠다. 매점에서 화장실까지의 길은 교통호처럼 눈담장이 이어지고, 화장실은 지붕까지 덮혀 있다.

 

"라디오 들었어? 어제 토왕에서 눈사태로 10여명이 매몰되서 수색 중이래."

 

97년 1월 신정 급박한 기상 변화로 3명의 목숨을 빼앗은 설악이 올해도 인명을 앗아갔다. 토왕에서의 눈사태라면 구조에 엄청난 어려움이 따를것이다. 비 적설기에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데다 많은 눈이 협곡에 쌓였다면 구조작업에 나선다 해도 달리 손을 쓸수 없는 곳이다. 산장에 들어가 이리저리 주파수를 잡아 뉴스를 찾아듣는데 이틀간의 폭설로 강원도 일원이 마비되었고, 설악산 토왕폭 눈사태 소식은 갇혀있는 나의 마음도 어둡게 했다.

2박3일 일정으로 다녀오겠다고 말한 탓에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할것이 염려되지만, 산장에 설치된 이동전화도 안테나와 태양전지판이 두꺼운 눈으로 덮혀 불통이다. 무사하니 마음만 고쳐먹으면 답답할것이 하나 없는 나이지만 나를 염려할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 졸일까.

 

아침은 산장매점의 컵라면과 초코파이로 해결한다. 부엌과 거실을 겸하고 있는 화전민 헛간 같은 곳에서 우물 우물 먹고 있는데, 성양수씨가 안스러운듯

 

"누군 밥먹고 누군 컵라면 먹고, 이거 미안해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려가."

 

"마음이야 당장 달려 내려 가고 싶지만 산장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는 곳 좀 보십시요. 설피신고, 스키로 왕복한 자국이 하나 없는데 저길을 내려설 자신은 없어요."

"어쩔꺼야? 밤에 눈발이 그쳤으니 자중으로 좀 내려 앉았을꺼야."

"이거 먹고 장비 챙기고 노인봉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날씨를 좀 두고 보고오후에 내려가야죠."

 

구름이 걷히고 햇볕이라도 강하게 내려쬐면 눈의 겉표면이 녹아들어 적설량의 반쯤으로 내려 앉으면서 자중에 의해 다져진다. 고산 원정대도 폭설이 내린 직후엔 운행을 멈추고 자중에 의해 적설상태가 내려앉고 크러스트되기를 기다렸다 움직인다는 얘기는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바이다. 눈이 그쳤다고 성급히 혼자서 하산하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토왕폭 소식 들었지. 답답한 놈들 설피나 스키신고 가면 금방 올라설것을 아마 맨몸으로 러셀하느라고 매몰된 사람들 다 얼어죽을꺼야."

 

나중에 안일이지만 2차, 3차 눈사태로 인해 구조대도 접근을 하지 못하고, 헬기 또한 협곡의 특성상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아침밥을 먹고 있는 산장 개를 내려다 보며

 

"이 개 이름은 뭐에요."

"개가 그냥 개지. 이름 없어."

 

대단한 사람이다. 데리고 살면서 이름도 안지어주다니

그렇게 해서 시작된 대화는 서로의 개인적인 것 까지 흉금없이 터놓게 했다.

 

노인봉산장에 찾아온 두 여대생 중 한명과 사랑이 이루어져 결혼하게 되고 비록 이렇게 떨어져 있긴 하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과 사랑에 대해 확고한 중심과 타당성 있는 가치관이 세워져 있다.

 

혼자 생활하는데 익숙해져 자기 세계에 들어오는것을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이긴 하지만, 몇일 동안 등산객이라곤 나 한명이고 먼저 말을 붙혀 오기 전엔 아쉬운게 있어도 말을 건네는 일이 없으니 그쪽에서 먼저 이것 저것을 물어온다. 결혼도 안했다. 직장생활도 얼마전에 관두고 자기일이라곤 변변치 못하게 하고 있으니 내세울것도 없어 세속의 잣대에 맞춰볼 화제거리가 없다.

 

"나도 늦게 장가 들었지만 좋은거 없어. 하산 하자 마자 장가 들을 여자 부터 찾으라고. 일이야 풀릴때 되면 풀리지만, 결혼이란건 때가 있는거라고."

"......"

 

달리 할말이 없는 곳에선 침묵이 최선의 답변이다.

 

"첫인상엔 워킹 좋아하고 말수 없고 배낭 보아하니 먹을 것 없어, 금방 죽자 살자 도와달라고 매달릴것 같더니 전화 쓰겠다는 말도 없어. 전화 쓰겠다고 해봐야 불통이지만."

"부모님이야 걱정하겠지만 종종 몇일씩 소식없이 여행하고 오는거 아시니까 걱정은 덜 하실겁니다."

주변의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 결국은 산 얘기로 접어든다.

"적설량이 적을때면 대관령에서 선자령을 거처 이곳까지 당일로 오는 산행팀들이 종종 있지. 대한민국에서 적설량이 가장 많은 곳이니까. 어제 그제 같은 날엔 히말라야원정대라고 해도 꼼짝마라지만. 눈이 많을때 이 밑에 폭포까지도 가봤는데 몇몇 텐트쳤던 자리는 있지만 이곳까지는 못올라와 힘 좋은 후배가 소금강에서 올라오려 했지만 3박4일을 몇몇이서 러셀하다 도로 내려갔다고 하더군."

"그만큼 이곳은 내가 아니면 지킬수 없는 곳이야. 사람들은 나를 욕쟁이니 괴팍한 산장지기로 알고 있지만, 난 이곳이 좋아. 이렇게 눈이 내려 집앞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보고 있으면 이곳 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지. 눈이 그치고 사람들이 몰려와 떠들고 아무데나 담배꽁초며 오줌을 싸 갈기면 내 마음도 어두워져. 장사에만 급급하게 되지. 나를 먹여살려주는 등산객들이기도 하지만, 나를 어지럽히는 것도 등산객이거든."

"매점으로 들어가는 눈굴 입구를 왜 그렇게 낮게했습니까?"

"허허, 거긴 깊은 뜻이 있지. 이곳에 들어오려면 모두들 머리를 수그리고 들어와야 하거든. 겸손해져라 이말이야."

 

내가 올라오기전 KBS 찰영팀이 연속극인지를 이곳에서 촬영했었단다. 월정사에서 본 일단의 일행들이 아마 그들이였나 보다.

 

"막걸리 한잔 할래?"

 

출출하니 한잔 생각이 간절하긴 하지만 몇일간 산장비와 아침으로 해결한 비싼 컵라면과 초코파이비용으로 올라갈 교통비가 넉넉하지 않아 참는다.

 

"노인봉에나 올라갔다 내려오겠습니다."

 

"올라가지마. 날이 흐려 전망도 않좋아. 그리고 이곳은 겨울에 일출이 황병산에 가려 바다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볼수가 없어. 여름철에나 이 앞 바다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볼수 있지. 아마 혼자 올라가기 힘들꺼야."

 

스톡하나를 챙겨들고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설피를 신지 않으니 눈속에서 헤엄을 친다. 그나마 발을 잘딛뎌 러셀 된곳이나 나무가지가 촘촘이 있는 곳을 밟으면 허리 높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가슴 높이 까지 빠지고, 목까지 빠진다. 스톡은 아무 소용 없고 가슴높이에 있는 눈을 손으로 헤치고 몸으로 밀면서 앞으로 나간다. 능선까지 올라오는데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능선에 올라서니 소황병산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진 능선과 영동고속도로로 다닐때는 볼수 없던 발왕산 용평스키장이 눈에 들어온다. 스키장이 아주 아주 멋지게 산을 망쳐 놓았다. 동대산과 두로봉 쪽은 구름에 가리워져 보이질 않고 대관령과 발왕산쪽만 두꺼운 구름을 헤치고 옅은 햇볕에 그 모습을 볼수 있다. 오늘 오후가 되어도 내려가지 못하겠다. 어제 오갔던 길임에도 서있다 발을 옮기려 무게중심을 움직이면 키 이상으로 내져앉는 눈위에서 헛되이 체력만 빼앗낄 뿐이였다.

 

눈범벅이 된 오버자켓과 트라우져를 벗고 침낭속에 들어 앉으니 답답함이 가슴한 구석을 지그시 찍어 누른다.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산 해야 한다. 내려가라고 산이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성양수씨가 큰소리로 내려오라고 해서 가보니 원두커피 한잔 하자고 한다. 커피를 즐겨 마시지는 않지만 달리 할일도 없어 거실겸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는 마다하고 뜨거운 물을 한컵 얻어마신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전화벨이 울린다. 잠깐 잠깐 들은 볕에 태양전지가 가동 되나 보다. 성양수씨가 받아보니 오대산국립공원관리소에서 등산객을 찾는 전화가 온것이다. 이곳은 다 무사하다는 보고 아닌 보고와 함께 나를 바꿔 준다.

 

"오대산관리사무소 분소장입니다. 오대산장에서 이틀 묵으시고 그곳에 올라가신 정윤배씨시죠?"

"에 맞습니다."

"3일전 우리 직원이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올라가셨습니까?"

"그런 제지는 못받았는데요."

"집에서 실종신고접수가 들어와 걱정 많이 했습니다. 산장과 전화연락도 안되고."

"아 예,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집에서 많이 걱정하십니다. 전화가 되면 연락 주십시요."

"이거 뭐라고 감사에 말씀 드릴수가 없군요. 이곳에서 안전하게 있으니 심려 마시고 안전하게 하산하겠습니다."

"예 그럼 안전하게 하산하리라 믿고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하산 후 들은 얘기지만 자주 등산을 다니는 동서남북에서 몇번씩이나 실종신고를 내놓고 소금강쪽과 월정사 쪽으로 하산한 등산객 명단에 내가 없자 급기야 천화대등반을 같이 했던 산골산악회 힘좋은 젊은 친구들과 수색조를 편성. 설악산쪽과 오대산 두팀으로 수색작업을 나서려고 했었다고 한다.

 

눈온다고 고스톱이나 치고 있을줄 알았던 공단직원과 직접 통화를 하니 무척 송구스럽다. 등산객 하나 조난당하면 힘들어지는 사람들은 바로 이사람들일테니 얼마나 걱정했었을까 아무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지만 나 혼자임이 아님을 절감한다.

 

"봐바 걱정들 하시지."

"예 집안에서 걱정 많이 되셨나 봅니다."

"전화 해볼래."

"됐습니다. 무사한지 알텐데요."

 

가족사에 관한 얘기, 세상 사는 얘기를 하다 산장의 내 자리로 돌아간다.

6일째 되가는 침낭은 몸에서 나온 습기로 눅눅해져 체온으로 한참을 덥혀도 한기가 가지시 않는다. 고어텍스 침낭커버가 좋긴 하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메트리스의 골진 부분에 성에가 끼어져 있다. 고어텍스의 투습기능으로 몸에서 나온 습기가 메트리스와 접촉해 그대로 얼어버린것이다. 하지만 몇일간 말려주질 않아 침낭 자체에 습기는 어쩔수없다.

 

어두워지면서 다시 싸라기눈이 내린다. 야채죽 반 남은 걸 끓이려 하는데 눈을 녹여 끓이기엔 휘발유량이 충분치 않다. 성양수씨에게 휘발유를 얻을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콜맨용 휘발유는 진부에서도 구할수 없어 나눠 주기 곤란하단다. 대신 아궁이에서 덥혀진 물을 1리터 보온병에 가득 담아준다.

 

"이곳에서 물 얻어간 사람은 예전에 아끼는 후배 하나하고 두번째야."

 

산장에 들어오던 날 설피를 신고 물을 받아놓지 않았으면 고생께나 했었을것이란다.

혹자는 산장에서 둘이 있으면서 산장지기의 인심에 대해 야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자빈곤으로 절약이 몸에 밴 그들의 생활습관에선 베품이 자기에겐 해가 될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해 안 사람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밥해주고 국해주고 따뜻하게 베풀어주고 싶은 마음이야 성양수씨도 인지상정 일 터이지만 내가 굳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자기 또한 누구에게 베풀 만큼의 살림살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등산객들이 쌀이나 부식등을 두고 가지만, 기본적인 것은 자기가 스스로 아래에서 부터 지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운 물로 끓여 금방 죽이 된다. 곡기가 들어가니 소화기관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린다. 두부 숭숭 썰어넣은 김치찌게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 생각이 간절하다. 나야 24시간 후면 따뜻한 아랫목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을 수 있지 않은가. 한그릇도 안되는 인스턴트 죽이지만 고맙게 생각하고 깨끗이 먹어치운다.

 

산장비와 아침식사, 막걸리값을 치렀다. 제천에서 직접 담았다는 막걸리를 딱 한사발만 사먹기로 하고 거실로 들어선다. 호롱불 두개로 어둑어둑한 실내인데도 머리에 켜고 있던 헤드랜턴을 끄란다.

 

잠시면 어둠에 익숙해진다면서. 오래되서 잘은 기억 나지 않지만 원시생활에서 조금 벗어난 그런 가재도구이다. 워낙이 차가운 막걸리라 석유버너불에 한번 데운다. 추운데서 있었던 몸이라 차가운게 들어가면 오한이 나기 때문이다. 막걸리주전자에 사발로 두사발을 붓고 원액 그대로 한잔 마시고선 물을 탄다. 원액이라 상당히 독하단다.

힘든 산행에 맛이 좋다고 몇사발씩 들이키곤 두러누웠다가 그 이튼날 하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단다. 방부제 하나 안들어간 막걸리는 정말 기억에 남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히다.

 

반찬으로 먹던 곰취 절인것을 내놓는데 얼마만에 먹어보는 반찬인지 그맛이 강하면서도 자고 있던 미각을 하나둘 일깨워 준다.

 

얼마전 주문진에서 사왔다는 꾸덕 꾸덕하게 덜 말린 양미리맛 또한 일품이다. 비린것을 좋아하지 않아 비위라도 상하면 어쩔까 싶었는데, 아궁이에 남은 알불로 살짝 구어 왕소금을 찍어 먹는 맛이란 티본스테이크에 비할바가 아니다. 담배 한대 피우며 한사발을 금방 들이키자. 부담갖지 말라며 자기가 내는 것이니 한잔 더 하잔다. 그렇게해서 또 한사발. 쭉 쭉 들이키는 모습을 보다

 

"자네 주사 없지?"

"주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심하면서 마시는거죠."

"자 그럼 이 주전자로 한 주전자만 더 먹지."

 

발동이 걸린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려면 더 먹으면 안되는데 건네주는 잔을 거절할수가 없다. 추운데서 마시는 술이라 취기가 오르지도 않는다.

 

산악스키에 대해서도 한참의 설명을 들었다. 전에 부터 스키장에서의 활강보다 산악스키의 매력을 느껴 왔는데 이렇다하게 산악스키를 즐기는 곳이 없었고, 산악전문지에서 가끔 코스 소개를 하긴 하지만 등산인구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내년 겨울엔 5조 정도의 스키 풀세트를 갖춰 임대를 해볼 생각이란다.

 

수요가 있을 법한 장사다. 노인봉에서 대관령까지 적설기의 산악스키 임대업은 일단 소문이 난다면 매니아들의 반응은 금방 올것 같다. 심설을 헤쳐나가야 하는 이곳 산악스키에서는 체력이 최대한의 관건이라는 설명이다. 겨울을 대비해 운동화를 신고 산악구보를 했을 만큼 매해 산악스키를 타다보면 체력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스키임대업을 한다면 이곳에서 2~3일 몇몇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능선 이곳 저곳을 다녀 보고 싶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노인봉 바로 아래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조그마한 오두막집에서 호롱불을 앞에 두고 세상사를 얘기한다. 오대산일대 백두대간을 조망해 볼수 있는 높은 상공에서 노인봉 정상 아랫자락 희미한 호롱불이 내비치는 거적을 넘어 도란 도란 밤이 깊어가는 정겨운 모습.

 

때론 격하게 때론 향수에 젖어.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지나온 과거 중 가장 곤궁했던 순간에서 화려했던 순간으로 그렇게 각기 살아온 다른 시간과 공간을 막걸리잔에 풀어넣어 공유하게 되었다.

방으로 까지 들어가 마신 술자리는 2시가 다되어 끝났다. 추운곳에서 자지 말고 아랫목에서 자라는 권유에도 산장의 숙박객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다. 막걸리 몇 주전자가 3일을 굶다 싶이한 빈속에 멀쩡할리가 없다. 취중에도 아침에 일어날 일이 걱정이였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내일은 따뜻한 내방에서 이 시간을 맞이 할것이다란 막연한 기대속에 눅눅한 침낭을 덥고 영하 7~8도의 산장 침상에서 술에 골아떨어진다.

 

 

 

1월 17일

힘차게 몸을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잠이 깨워졌다. 방금 누운것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인가. 잠이 들지도 않고 술이 이제 취했는데 일어나는 나를 보고 아침 먹으러 오라는 말을 남기고 성양수씨가 나갔다. 시간은 4시 30분 채 2시간 반을 못잤다. 워낙이 추워서 일까 몸은 말을 안듣는데 정신은 아주 맑다.

 

'그래 내려가야지.'

 

몇일을 꽝꽝 얼은 밥한덩이와 인스턴트 육계장을 주방 아궁이 불로 덥히고, 널널한 배낭에 장비들을 챙긴다. 술이 덜깨고, 잠이 덜깬 상태에서도 빠진것이 없나 복장은 확실한가를 챙기고 주방으로 간다. 국은 반이나 녹았을까? 코펠에 뜨거운 밥과 된장국을 퍼담아준다. 몇일만에 먹어보는 뜨거운 식사인가, 그렇게 반가운 밥과 국이 속에 들어가니 모래알이 쓸고 내리는듯 하다.

 

몇시간 걸려 내려갈지 모르지만 비상식도 없다. 먹다 토해도 일단 위를 채워 놓아야한다. 허기가 지면 심설속에서 오도가도 못한다. 채 녹지 않은 밥과 국은 이름이 개인 개에게 준다. 개밥이나 내밥이나 별반 다를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게 설피를 동여매고 칠흙같이 어두운 산장을 나선 시각은 5시 10분 쯤 산장 옆 그 멋진 수문장과 길게 작별할 시간도 없이 스키자국은 저 만치 앞서 간다. 허겁지겁 먹은 밥이 채 식도를 내려 가기도 전에 가쁜 숨이 기도를 오간다. 차가운 공기의 흡입으로 몇번의 밭은기침을 하고 뒤처지지 않으려 허리를 수그리고 스키 뒤를 쫒는다.

능선위에 올라 나를 기다려 주곤 뒤에 따라 붙어 두번의 심호흡을 몰아쉬니 또 앞장서 간다.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 그때 당시엔 모르겠다. 아마 술김에 그렇게 따라 붙었을 것이다. 쌓인 눈 아래가 균일하지 않은 곳에선 설피 신은 발도 균형을 잃고 꺼꾸로 처박히기를 몇번, 식도에선 생목이 올라와 쓰리다 못해 아프기 까지 하다.

첫번째 목책을 지나고, 두번째 목책을 지날 때쯤 뒤돌아 보면서 담배를 한대 피워 문다. 부식이라곤 초코렛바 두개 들은 배낭이 힘에 부치다. 목이 타올라 보온병에서 뜨거운 물을 마신다. 조금 속이 가라 앉는듯 하다. 성양수씨의 홀쭉한 배낭 뒤에서 딸그럭 거리는 스키스토퍼를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부러져 나갈듯 잔뜩 눈을 이고 있는 멋진 풍광의 나무들을 바라볼 정신적 여유는 산장 침상에다 두고 왔다. 오직 스키자국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감.

 

취기는 다하고 숙취만이 남아있고, 절박감 만큼이나 체력 저하를 실감한다. 쫓아오지 못하는 내 모습을 뒤돌아 불때가 많아 졌다. 50걸음 걷고 앞서 가는 배낭을 쳐다보고 뒤돌아 보면 또 걸음을 옮기고 시야가 노랗게 변할 때쯤 휴식을 취한다.

 

"어때 갈만하지?"

"갈만하죠. 못가도 가야죠."

"즐거웠던 일들만 생각해."

 

힘들단 생각 뿐이 안든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

노인봉 정상과 산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어디쯤에서 이정표를 찾아보려 했지만 눈에 파묻혀서 인지 찾아볼수가 없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바라보고 배낭을 빼앗듯이 바꿔 맨다. 그러면 안된다고 몇번 힘없는 거부의사를 내보이곤 그 홀쭉한 배낭을 받아맸다. 그래도 발걸음은 좀처럼 이전의 속도를 되찾지 못한다. 걸음마 걸음마 걸음을 걷다 숨을 몰아쉰다.

 

"허억 허억 허어억."

 

세번의 거친 호흡을 몰아쉬면 여지없이 뒤에서 스키 코가 엉덩이를 쿡하고 친다. 몸을 전, 후로 움직이면서 한걸음 그렇게 몸의 반동을 살려 걸음을 옮기다 멈춰 3번의 숨을 몰아쉬면 여지없이 스키콧날이 엉덩이에 와서 박힌다.

 

제법 경사가 있는 내리막 능선에서도 뒤에 있는 발을 앞으로 내딪는다 것이 힘들게 박힌 말뚝을 빼올리는 것 만큼 힘이 든다. 나무에 내린 눈가루가 날리는지 얼굴 전체에는 땀과 날린 눈을 수시로 장갑낀 손으로 쓸어 내려야 했다.

 

눈썹에 달라붙는 입김의 수증기가 금방 금방 얼어붙고,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닌듯 하것만 입 주위의 오버자켓엔 하얗게 내뿜는 입김으로 허옇게 성애가 끼어 있다. 눈이 올때는 날씨가 포근한 편이였다. 눈이 그치고 바람이 부니 기온은 곤두박질 친것이다.

 

어디 평평한 땅에 뒤로 벌렁 누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진고개 아스팔트를 밟을때 까지는 발걸음 옮기는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두가지의 생각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렇게 올라올때 급경사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내려섰다. 10시 방향으로 진고개휴게소가 보인다.

 

'다 왔다. 저 널찍히 보이는 구릉을 내려섰다 올라서면 그때 부턴 뛰어서 갈수 있을 것이다.'

 

고랭지 채소밭에 들어서자 가끔씩 나를 뒤돌아보곤 부단히 앞으로 나가더니 구릉을 내려서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혼자다. 시야도 틔어있고 길 잃을 염려도 없다. 이곳에서 직선으로 이어진 휴게소 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릉으로 또 올라섰다 가는 것일까. 30 걸음을 옮기고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춰서자는 결심도 잠시 20걸음, 10걸음에 스톡을 두손으로 쥐어잡고 머리를 숙여 숨을 헉헉 몰아쉰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난다. 치열하게 살아간다는건 매 순간 마다 이런 고통인 것일까. 나와의 싸움도 이렇게 치열한데...... 너무 힘들다.

 

'이제 다 왔어. 휴게소만 가면 아무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언제 그랬느냐싶게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될꺼야.'

 

성양수씨가 사라진 구릉위에 올라서니 진고개 산장도 4일전 동대산에서 내려왔던 고개마루도 눈에 들어온다. 뒤에 있는 발을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된다.그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진고개산장을 지나치고 매표소를 지나쳐 아스팔트에 내려서는 순간 귀환의 기쁨인지, 고통에서의 해방감 때문인지 눈시울이 화끈 달아오르며 입에선 울음도 아니요 신음소리도 아닌것이 터져나오려고 한다. 전방 30미터 앞에서 3명의 등산객이 트렁크에서 배낭등을 내리며 이쪽을 처다보지 않았다면 그자리 철푸더니 주저 앉아 펑펑 울었을 것이다.

 

스톡 하나에 몸을 의지해 낮설은 설피를 신고, 달표면을 걷듯 느릿 느릿 자기네들 앞을 지나가는 나를 보고 신기한듯 또는 우스운듯 힐끗 힐끗 쳐다본다.

 

'몇년만에 내린 폭설이 신기한듯 당신들 여기선 경외감과 감탄으로 적설량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지. 더도 말고 진고개산장까지만 올라가봐라.'

 

나와 같은 고생을 할것을 짐작하니 갑자기 삐죽삐죽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처음 실성하게 되면 이런 기분일까. 이때의 표정을 사진이나 비디오로 담아냈다면 뇌성마비자의 얼굴 모습 그대로이다. 고통스러움에 일그러져 보이는 모습이 이런 기분이라면 보기와는 다르게 늘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노인봉에서 내려오십니까?"

"예"

"눈 많이 쌓였죠. 갈만합니까?"

"올라가 보십시요. 러셀은 되어 있으니까요."

 

만류하고 싶다. 하지만 먼곳에서 이곳까지 눈 밟으러 온 사람들이 말린다고 올라가지 않을리 없다. 오히려 자기실력을 과소평가하는 데서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휴게소 입구에 스키가 세워져 있다. 그 스키 위에 이곳까지 나를 내려다 준 설피를 벗어 올려놓는다. 마음 같아선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지만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것을 가져 간다는건 내 욕심이다.

휴게소 식당에 올라가 국수 한그릇을 대접해 드렸다. 서둘러 매점에 들려 담배도 두갑 사서 드리고 노고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기엔 미약하기 짝이없지만 올라갈 차비 마져 빠듯해 물질적인 감사는 더 드릴수가 없었다.

창문 밖으로 진고개산장으로 올라가는 3명이 보이는데 볼적 마다 그자리인게 도무지 앞으로 나가는 것 같지 않다. 하산길에도 힘이 들었는데 오르막 길에서야 오즉 할까.

 

"어때 문명세계가 좋긴 좋지."

 

싱긋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표정 같다. 휴게소 직원들에겐 늘 대하던 사람이지만 고개를 넘다 잠시 들린 사람들에겐 그의 모습은 기인중에 기인이다.

 

생전 감지도 빗지도 않은 반백의 헝크러진 긴 머리, 아무렇게나 자란 구렛나루수염, 외모로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같아 보인다. 삶의 역경이 그를 현실과 동 떨어지게 하였든 자아의지에 의해서든.

노인봉에 성양수씨를 못본 사람이라면 요즘의 배철수나 얼마전의 이외수를 연상하면 된다. 외모의 급수를 매긴다면 배철수 < 이외수 < 성양수 순이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수자 돌림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햇볕과 모진 풍상으로 주름진 얼굴을 씽긋 웃어보이며 잘가라는 말을 건넨다.

 

"분소장 한테 전화해줘. 무사히 하산했다고."

"또 들리게. 다음에 들릴때는 모든게 잘되어있기 바라네. "

"예. 감사합니다. 다음에 뵐때 까지 몸 건강히 안녕히 계십시오."

 

집과 분소장에게 전화를 걸고 담배 한대 피워 물며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려다 보는데 등산객 3명은 첫번째 구릉에서 되돌아 내려오는듯 하다. 거기 까지 올라가는데도 1시간 남짓 걸렸으니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2시간 30분 남짓 올라간 길을 7시간 30분이나 걸려 내려온 것이다. 스키로 길을 다지고, 설피를 신고서, 혼자서 였다면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길이라도 잃었다면 위험한 지경에 다다를수도 있었다. 무리하지 않은 산행계획과 성양수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하산 할수 있었다.

오대산의 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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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십오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 아문젠전기, 힐러리와 텐징 같은 책등을 읽어 보고, 악천후로 산속에 고립된다거나 무인도에 표류해 생활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돌로 만든 창으로 짐승을 사냥해 먹고, 나무가지로 움막을 짓고 자연과 싸우며 스스로의 힘으로 하루 하루를 개척해 나가는 그런 상상의 나래를.....

노인봉에서의 며칠은 상상했던것 만큼 낭만적이지도 급박한 위기상황에 노출되지도 않았다. 산악스키와 꾸준히 체력을 단련한 성양수씨에게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운동일 뿐이였을 것이다. 본인도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가슴 아픈것은 하산 후 몇일만에 동일한 코스에서 두명의 동사자가 발생한 신문 보도를 대하게 된것이다. 악천후가 아니라면 진고개에 차를 세워두고 음료수 하나 들고 가볍게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올수 있는 길임에도.

어떤 친구에게서 작년 4월 민주지산에서의 악천후시 공수부대 한개 팀이 집단으로 동사한 보도를 보고 어떻게 군인이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느냐고 개탄을 한적이 있었다. 강인한 체력과 훌륭한 판단력도 부실한 장비로 악천후를 만나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이글을 읽게될 겨울산 초심자들에게 장비의 소중함과 무모한 산행의 결과를 생각해 신중함을 기하는데도 일조를 하게 된다면 더더욱 바랄것이 없겠다.

올 겨울 당초 예상과는 달리 푸근한 날씨와(어제 오늘 동장군의 위세가 대단하지만) 겨울 가뭄으로 산엔 먼지만 풀풀 날리고, 신정 초 설악산을 다녀온 사람에게 등산로에 눈보다 빙판이 많아 겨울산 다운 면모는 찾아볼수 없었다고 전하는 소식을 들었다. 가장 많은 적설량을 보여야 할 요즈음 겨울 가뭄을 참다 못해 작년의 기억을 되살려 쓰게 된것이 지독스럽게 길게 되었다.

지루함을 참고 여기까지 읽게된 분들에게 눈에 대한 간접체험이나마 공유하고 싶어 올린 글이므로 소중한 시간이 이 글로 헛되이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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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시기는 98년 1월 중순, 이 글을 쓴 시기는 99년 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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