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사진관/전람회의그림

시인 박노해 사진전 ' 나 거기에 그들처럼 '

오체투지해무 2010. 10. 7. 15:19

 

 

"시인이 시를 써야지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 했는데,

역시 사진 보다는 글이다.

 

칭찬 일색의 박노해 사진전 네티즌 평에 딴죽을 걸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진을 보고, 사진 설명을 읽고 느낀 감상과 의문을 두서 없이 적어 보기로 한다.

굵은 글씨로 쓴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에티오피아의 영성. 아디스아바바 2008.

수도 아디스아바바 성당에서 열린 일요 미사.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는 그리스도교 양식이지만,

양손을 위로 받드는 것은 이슬람식 '두아(기도)'이고,

찬송하며 치는 박수는 아프리카 토착 리듬이다.

" 하느님은 저 높은 곳에 있지 않아요.

여기 검은 땅 낮은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어요."

 

인물 사진을 통털어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

같은 니그로라도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어딘지 우간다나 르완다 사람들에 비해서 정돈된 얼굴이다.

28미리 이상의 광각인 듯, 가까이 접근해서 찍었을텐데,

낯선이에 대한 경계나 카메라에 대한 적대감을 엿볼 수 없다.

차도르를 둘렀지만,

가리지 않은 얼굴의 선이 세련됐다.

내세를 갈구하는지,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지,

여인의 시선에서 맑은 슬픔과 희망을 본다.

 

전시장 전체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듣고,

똑딱이로 찍어 얼이 비추지만, 그 점이 내가 사진에서 느낀 점을 전달하기에 직접적이다.

 

 

 

에티오피아의 아침을 여는 '분나  세레모니'

 

에티오피아의 모든 아침은 집집마다 향기 그윽한

'분나 세레모니'(커피의례)로 시작된다.

무쇠판에 커피공을 보고 나무절구에 빻아서

천천히 끓여내는 것은 젊은 어머니가 주재한다.

할머니는 볶은 보리를 나눠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잔은 우애의 잔.

두 번째 잔은 평화의 잔,

세 번째 잔은 축복의 잔.

가족들은 세잔의 분나를 마시고 포옹을 나누며

해뜨는 대지의 일터로 떠난다.

 

첫번째 잔의 의미, 두 번째 잔의 의미, 세 번째 잔의 의미가 좋아 글을 옮겨 본다.

세상 남자들아 할머니 말 명심해라.

 

등허리에 물을 지고 gondar 에티오피아 2008.

양가죽 부대에 생명수를 지고 가는

젊은 여자들의 등허리가 절로 숙여진다.

고귀한 것은 늘 무거운 것.

사랑은 자신의 등허리를 숙이는 것.

아프리카 고원에 선 아카시아 나무들도

겸손히 등허리가 숙여져 있다.

 

고귀한 것은 늘 무거운 것.

사랑은 자신의 등허리를 숙이는 것.

 

가죽의 탄생

... 생략

가죽이 연해질수록 아이들의 발바닥은 딱딱해지고,

가죽이 고와질수록 아이들의 발꿈치는 갈라져 간다.

 

 

 

 

내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다.

bahir dar 에티오피아 2008.

 

오늘은 새해 아침.

물을 길으러 높은 산맥 길을 걷는 어머니와

그 뒤를 따르는 아들의 발걸음이 산정을 울린다.

자신이 살아가는 땅을 조금도 망치지 않고

가난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저 강인한 삶의 행진에 여명이 밝아온다.

 

박노해 시인이 직접 적은 사진 설명임이 확실하다는 전시장 도우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한 글.

가난은 비루한 것이지만, 가난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아름답다.

마치 가난한 삶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착각하게 한다.

자칫 가난 속에서 최선 다한다는 것이 자본가의 배를 불려주는 것 아닐까 하는

위험한 생각을 해본다.

 

자본의 기회가 닿아도 자신이 살아가는 땅을 망칠지 안망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둑길을 따라 걷는 모자와 첩첩히 그려진 산그리메는 슬프도록 아름답다.

 

 

나일 강가의 저녁 기도

나일강에 붉은 석양이 내리면 이 땅의 사람들은

저문 강에 얼굴을 씻고 네 번째 기도인 마그립을 올린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아는 나일강처럼

나 또한 나의 길을 굽힘없이 흘러가리라 다짐하면서.

 

 

나는 여기 살아 있다.

모래폭풍을 뚫고 살아 남았다.

45도의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나를 보호해 줄 것은 작은 돌담 하나.

그마저 하붑이 쓸어가 버렸어도

나는 이 자리에서 나를 지켜가며

끝내 푸른 잎을 휘날리리라.

 

시인은 나무가 되고,

나는 나무가 된 시인이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자리를 지켜 나갈 힘을 얻는다.

 

 

 

척박한 땅에서는 윈도우 배경 화면 같은 풍경에도 경작을 해야 한다.

 

 시리아 사막 길에서 저녁 기도를 바치는 이라크 인들.

 

...생략

노을이 지고 어둠이 올 때까지 일어설 줄 모른다.

무릎 끓는 힘으로 다시 일어서기 위하여.

 

 

 

 

 

 

자신이 살고 있던 땅에서 쫓겨 나는 팔레스타인 여인이라는데...

가재도구 하나 안들려 보내나.

사진 설명이 아니었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을 사진.

안타깝다 사진설명... 그래서 전시회 도우미에게 물어봤다.

시인 본인이 쓴 사진 설명 맞단다.

 

소수민족 대학생의 방학

...생략

배울수록 차별은 크게 느껴지고

오를수록 수심은 깊어져 간다.

 

 초원에서 빈민가로 내몰린 가족

값비싼 캐시미어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몽골 정부가 풀뿌리까지 캐먹는 염소 방목을 장려하자

몽골 초원이 황폐화되고 사막이 늘어간다.

대대로 초지면적당 동물의 제한 숫자와 다양한 종을 지켜오던

유목민의 전통윤리는 경제논리에 무너져 간다.

양떼를 잃고 수도 울란바토르의 빈민가로 내몰린 사람들.

아버지에게는 돌아 나갈 초원이 없는데

아이에게는 딛고 나갈 무엇이 남았는가.

 

몇 해 전 몽골의 오지 마을에 들린 적이 있다.

한국의 선교사는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융자를 얻어 염소와 양의 숫자를 늘려 수입을 높이 자는 것.

그 선교사는 너무도 순수해 보여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리마의 상징인 십자가상 뒤편

cerro san cristobal, lima, peru 2010

...생략

십자가 그림자는 저 낮은 빈민가로 임한다.

...생략.

 

시인의 마음은 저 낮은 곳으로 향한다.

낮은 곳으로 향해야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높은 곳으로 향해야 살맛이 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세상이다.

아 높고 낮음이여.

 

 

 

어느 시대, 어느 나라던가 가난한 사람들은 산동네에서 아무것도 없이 논다.

 

 

초현실의 세계를 보는 것 같다.

도대체 곡식이 자랄 것 같지 않은 저 땅에 메어 놓은 이랑에서는 무엇이 얼마만큼 자랄것이며,

저 땅을 일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의 무게는...

 

 

체 게바라에게 마지막 땅콩 죽을 끓여 줬다는 할머니.

체 게바라라는 이름 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리라.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체 게바라의 피 끓는 기침 소리가 난다는 체 게바라 길.

 

 

오래된 직접 민주주의

 

3개월마다 열리는 께로족의 총회 론다 컨퍼렌시아.

...중략.

나이 어린 사람이건 부녀자건 모두가 발언하고 모두가 경청하고

거침 없는 토론을 통해 전원 합의에 도달하는

유구한 직접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놀라운 현장이다.

 

 

 

 

내가 걷는 길

yanacancha cusco peru 2010

오늘도 길을 걷는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곳에서 와서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힘든 발자국들은

한 줌 이슬처럼 바람에 흩어지니,

그러나 염려하지 마라.

그 고독한 길을 지금 우리 함께 걷고 있으니.

 

그 길이 높은 곳으로 향하던, 낮은 곳으로 향하던 위로가 되어 주고 힘이 되어 준다.

시인의 글이 나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정말 화려한 사진 전시회.

제 2의 워낭소리가 될 소지가 있는 전시회.

사진하는 사람들이라면 욕심나는 전시회.

지난 십년의 고난한 세월을 한 눈에 보기에 분이 넘치는 전시회.

 

쿠바 아바나의 뒷골목에서 깡통과 빈병을 줍거나,

구두딱기를 하던 사람들이 만든 음악을 

카네기홀에 입장 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즐기는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