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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노적사

오체투지해무 2010. 9. 29. 14:28

 

노적사 뜨락에서 올려다 본 노적봉.

 

 

대웅전 뒤편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면서 부속건물과 시설들이 늘었다.

 

 

중앙이 미륵불, 우측의 삼층석탑이 부처님 진시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다.

 

 

노적사 주지스님의

 

의상봉과 용출봉이 건너다 보인다.

안부 아래 국녕사 대붕이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선명하다.

 

 

 

 

---참고자료---

 

 북한산 노적사(北漢山 露積寺) 
조선시대 숙종 때(1712년) 팔도도총섭이었던 성능스님이 창건한 노적사는 서울의 제일명산 북한산의 중심 노적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명승고찰이다.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에 크게 기여한 성능스님이 집필한 옛문헌 ‘북한지’의 기록을 보면 창건 당시엔 진국사(鎭國寺)라 불렀는데, 완전히 소실(연대 미상)되어 빈터만 남게 된 것을, 이를 애석히 여기던 중 서기 1960년 무위스님을 비롯한 창암 유흥억거사, 박금륜행보살, 김진공성보살, 유인순보살 등 여러 불자님들이 불심으로 정성을 모아 사찰을 중창하고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노적사 주지로 부임한 종후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 삼성각, 나한전, 미륵불입상, 약사여래불좌상, 용궁전, 종각, 요사채 등 오늘날의 노적사로 중흥시켰다. 웅장하고 신령한 노적봉 아래의 노적사는 천혜의 자연속에 자리한 기도영험이 뛰어난 지상선경(地上仙境)의 사찰이다. 2001년 1월에 전통사찰로 등록된 노적사는 대원력의 수행도량, 화엄신중 기도도량, 나한성중 기도도량, 평화통일 기도도량, 청정법신불 기도도량으로서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빛이 가득한, 무한대광명의 부처님도량이다.

 

북한산의 원이름은 삼각산이다. 삼각산은 우리말로 ‘세 부리’에서 온 것인데 보는 방향에 따라 백운대, 국망봉, 인수봉을 꼽기도 하고, 백운대, 국망봉, 노적봉을 말하기도 한다. 그 노적봉 아래 노적사가 있다. 노적사는 조선시대 숙종 때 팔도도총섭이었던 성능스님이 창건하였다. 노적사의 창건 당시의 사명(寺名)은 진국사(鎭國寺)였다. 성능스님이 집필한 옛 문헌 ‘북한지’ 기록을 보면 ‘노적사는 노적봉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85칸으로 노적봉 아래쪽 중성문 안에 있다’고 되어 있다. 조선시대 숙종·영조 때의 고승인 성능스님은 우리 민족의 훌륭한 국방문화유산인 북한산성의 축성과 수비에 크게 기여하였고, 북한산에 진국사 등 사암을 창건하는 등 크게 불사를 일으킨 바 있다. 30년 넘게 긴 세월을 북한산성과 함께 살아온 성능스님은 북한산성의 축성과 여러 사찰의 증설, 승병의 모든 관리를 시종일관 감독하였는데, 영조 21년(1745년) 북한산성을 떠나 남쪽 화엄사로 내려간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섭에게 자신이 관장했던 모든 사무를 인계하고 그 사실들은 종합하여 한 권의 책을 편찬하였는데, 14개 항목으로 분류한 책이 바로 ‘북한지’이다. 1745년(영조21년)에 성능스님이 편찬한 북한지는 삼각산내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지리서로서, 숙종 당시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의 과정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북한산성을 숙종37년(1711년) 4월 3일부터 동년 10월 18일까지 약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 많은 반대와 경제적인 악조건을 극복하고 완성하였다. 북한산성은 고양시 북한동 산 1-1번지에 위치하고,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162호로 지정돼 있다. 이 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시대 초기에 처음 축성돼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수없이 증개축돼 왔다.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의 대부분은 조선조 숙종 당시에 쌓여진 것으로 전면적 168,989평에 이르며, 성벽의 높이는 3∼5m, 총 길이 9.24km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산성은 이중의 석성으로서 재질의 대부분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이며, 외곽의 산성에는 성문 13개(12개의 성문과 수문1개)와 성내의 중성문 그리고 시구문, 암문, 위문 등 15개의 성문 일부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산성을 쌓기 전 산성내에 중흥사란 절이 있었는데, 성능스님이 산성공사를 하면서 중요시되는 요충지에 중흥사외에 11개의 사찰을 새로이 건축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진국사, 오늘의 노적사인 것이다. 노적사는 중성문 안쪽 노적봉 아래에 있는데, 현재 대웅전, 나한전, 삼성각, 미륵불입상, 약사여래불좌상, 용궁전 등을 갖추고 있다. 노적사는 북한지의 문헌 기록을 보면 1712년 성능스님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당시엔 진국사라 불렀는데 완전히 소실(연대미상)되어, 빈터만 남게 된 것을 이를 애석히 여기던 중 서기 1960년(불기2504년) 무위스님을 비롯한 여러 승도들이 합심하여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창하여 노적사라 하였다. 현재의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기와집으로 1986년에 종후스님(현 주지스님)이 조성하였는데 중앙에는 삼존불과 후불성화가 위치하고 있다. 경내에는 조선시대 숙종 때 진국사 창건 당시의 석사자상(해태상)과 석축이 남아 있고 와편이 다수 산포되어 있어, 노적사가 전통사찰로 지정 등록(2001년)된 조건인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땅의 기운이 가장 승한 곳으로 나라안에서 네 곳을 꼽았다.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북한산), 진잠(대전)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정기가 가장 빼어난 명산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삼각산을 으뜸으로 꼽았다. 이중환은 ‘삼각산의 동남북은 모두 큰 강이 둘렀고, 서쪽으로는 조수와 통한다. 여러 곳의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북악)이 서리어 온 나라의 정기가 그곳에 모였다’고 풀이했다. 정기가 가장 빼어난 명산 북한산에 노적봉 노적사가 있다.


★ 이중환 :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은 실사구시(實事求是 :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 정신으로 삼십년간 전국을 누비며 지리·사회·경제를 연구하여 실학사상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중환이 후손에게 남긴 택리지(擇里志)는 평생 전국을 누비며 쓴 민족의 고전으로 우리땅의 지리, 지형, 풍수, 풍토, 역사, 인물, 교통, 산수, 인심, 문화유산, 절경 등 우리 땅의 생생한 모습이 담겨 있다.

 

노적사의 계단을 걸어 올라오면 처음 대하게 되는 석사자상.
노적사의 석사자상이 눈속에 묻혔다.
등에 말안장을 덮고 대좌를 장방향으로 얹은 것이 문수보살님을 태웠던 석사자로 보인다.
부분적으로 약간 파손되었으나 시대는 조선시대 후기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를 오른쪽을 향해 살짝 돌린 채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어 웃음이 절로 나올만큼 해학적인 면을 보여준다.
석사자상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을 현재 찾을 수 없고, 석사자상 자체에 명문(銘文)이 없어 안타깝지만, 문화재로서의 역사적 가치여부는 고증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조선의 시인 이덕무의 ‘진국사(현 노적사)’ 

鎭國寺
背山暎樓, 崎嶇而北, 三丈石, 銘曰白雲洞門, 循石路, 到寺門, 紅樹白石,
壑而冷冷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조사가 동토에 심인을 전하니 노적도량이 본주인이라.”  일붕 서경보스님께서 노적사 주지 종후스님에게 전한 법문으로, ‘심인(心印)’은 선가에서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깨달음을 뜻한다. 조사가 동토에 심인을 전하는 데, 노적사가 주인노릇을 할 것이다.      한국불교계의 거목 장봉 김지견박사가 노적사 주지 종후스님에게 드린 한시이다. 화엄사상의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며 한국불교학계를 선도해온 김지견박사는 신라시대 의상스님부터 조선시대 도봉·유문스님에 이르는 의상계화엄 연구에 몰두해 한국 화엄의 독자성을 밝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외국인이 본 노적사
노적사는 아름답고 평화롭고 생기가 가득하다 


노적사를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노적사에 대한 느낌을 말한 것을 정리해보니 노적사는 ‘아름답다, 평화롭다, 생기가 가득하다…’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그 먼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이 노적사에 올라와 우러나온 첫느낌이요, 처음마음이다.
노적봉 노적사의 실상(참모습)과 외국인들의 불성(佛性)이 만나는 순간, ‘아름답고 평화롭고 생생(生生)하다’는 마음이, 아름다움과 평화로움과 생생함이 바로 솟구친 것이다.
노적사에 대한 외국인들의 첫느낌은 더 이상 달리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간결하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생생하다’는 것이 바로 본래의 마음, 본래의 면목, 본래의 모습, 실상이다. 노적사의 참된 모습이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생생한 마음이 바로 부처님마음이요 불성(佛性)이다.

노적사 건너편 국녕사 쪽에서 노적사 원경을 촬영하려 했으나, 원경이 확실하게 나오지 않아 국녕사 옆 바위능선을 타고 올라가 길없는 길을 찾아 촬영하였다. 녹음이 무성하게 노적사를 둘러싸고, 안개가 옅게 깔려 선명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노적봉 아래의 노적사의 원경과, 확대촬영한 노적사의 전경을 볼 수 있겠다.
건너편 정상에서 바라보니 수호신처럼 부처님처럼 원효봉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노적봉이 이어지고, 하늘 아래 거칠 것 없는 그 노적봉 아래 노적사가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것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북한산의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품안에, 부처님의 가장 따뜻한 품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부처님 계신 노적사에서 불자님 모두 마음을 닦아, 가장 맑고 깨끗한 청정무구심으로 생명의 참모습을 깨달아, 가장 밝은 마음으로 생활하여 원만성취하시기를, 기도하며 노적사 원경을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