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TRAIN/SOUL TRAIN

설악 공룡능

오체투지해무 2009. 5. 20. 13:29

설악 공룡능 1275.

 

 

나는 설악에 대해 아직 까지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으로 내설악에 들어가 오세암 가는 길, 만경대에서 바라본 내설악의 전경은 아름다운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오감의 한계능력을 벗어난 것이였다.

 

 누군가가 설악에 대해 물어보면 구구절절한 표현대신 내설악 만경대에 올라보라고 한다.

 그곳 풍경은 눈을 통해 대뇌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전체로 받아들여진다. 대형가스폭파 현장에서 가슴으로 전해오는 폭발 진동처럼 설악의 풍경은 빛의 속도로 가슴을 치고 나간다.

 

강남터미날을 4시 50분에 출발 속초터미날에 9시 30분에 도착했다. 설악동 관리사무소는 정념이 떨어지게 하는 몇 번의 일이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 산장만큼이나 딱딱거리고 거만을 떠는데 거리낌이 없는 곳이다.

 

설악동에 도착 한 시각은 10시. 주차장에는 단체등산객들이 등산화끈을 조여 매는 등 야간산행 준비를 하고 있다. 대략 40여명이 넘어 보인다.

‘하산하는 길일까? 입산하는 길일까.’

입산하는 길이라면 그들에게 묻어 가면 무사 통과할 법도 한데 아직도 출발할 기미가 안 보인다. 

매표소의 불이 꺼져있다. 입장요금은 차치하고 관리직원과 야간산행에 대한 입씨름을 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매표소를 몇 십미터 지나는데 좌측 커피자판기 앞에서 술에 취한 몇몇의 관광객이 들뜬 목소리로 커피를 뽑아먹으며 잡담을 하고 있다. 토요일 저녁인데도 왕래하는 사람들이 없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입구쪽으로 나가던 남자가 우리 일행을 불러세운다.

“아저씨 아저씨”

“예, 우리 말입니까?”

“지금 어디 가는 길이요?”

“......”

난데 없이 커피를 빼먹던 사람이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 묻는 저의가 궁금하다.

보면 모르나 80리터 배낭에 등산 온 사람이지.

“여기 관리직원인데. 야간산행 금지인거 모릅니까. 그런 생각으로 여태 등산을 다녔다니 인식이 잘못되어 있네.”

비선대 까지 만 갈 거라는 데도 야간산행으로 비선대 까지 가겠다는 지 딴에는 그릇된 인식을 순화교육 내지는 인식의 전환계기로 삼고 싶은가 보다.

 

한마디만 더 했어도 내 입에서 상스러운 소리가 나갈 뻔했다.

매표소 불 끄고 어디서 한잔했으면 못 본 척 하고 그냥 가던가 야간산행 통제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뒤에 40여명의 등산객은 야간입산허가 절차라도 받아 왔다는 건가?

대한민국 어느 산악회가 야간산행 입산허가를 받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신흥사에서 비선대 못 미쳐 음식점까지 들락거리는 차량들이 꽤 된다. 서울과 인천 넘버의 지프차들이 좁은 산책로를 먼지 일으키며 달려간다. 도대체 보행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들의 차량은 식당 못 미쳐 약간의 주차공간이 나오는 곳에서 만날 수 있었고 장비 챙기는 것을 보아하니 비선대 일대 바위를 하러 온 바위꾼들이다.

‘ 자식들 산책로에서 그 따위로 운전하는 놈들이 있어.’ 한마디 해줄까 하다 오히려 기분만 상할 것 같아 모른 체 그냥 지나친다.

 

비선대에 도착하고 자리 배정을 받는데 널널한 자리임에도 산장관리인은 규정된 넓이만큼의 자리를 넘지 못하게 잔소리를 한다. 앞으로도 70여명이 더 올 것이란다. 그 얘기를 들으니 입구에서 만난 관리직원의 잔소리가 더 괘씸하게 느껴진다.

 

단체로 올 때는 야간산행이 가능하고 개인 출발 할 때는 설악동에서 비선대 마저도 못 간다는 규정을 국립공원 홈페이지 대문에다 도배를 해놨다면 수긍이 갈 만도 하다. 아니 토요일 오후 밀리는 교통지옥을 뚫고 설악동 입구까지 왔는데 등산로라고 할 수 없는 비선대까지도 못가게 하는 그런 규정은 도대체 누구편의를 위해 만들어 졌는지. 그따위 관념으로 규정을 만들고 관리를 하는 그들의 쌍판때기를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밀려오는 단체 산행객들로 부터 자리를 확보하고자 침낭을 깔아놓고 비선대까지 오느라 흘린 땀을 식히러 산장 발코니로 나갔다.

얼마 후 설악동 주차장에서 등산화를 고쳐 신던 일단의 등산객들이 산장 안으로 밀려온다. 11시가 넘었는데 일행이 많은지라 짝을 찾고,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가 시끌시끌하다.

 

먼저 산장에 도착 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하무인이다. 저마다 김선생, 이선생을 찾고 있지만 선생이란 호칭을 들을만한 사람은 한명도 없는 것 같다. 이들은 새벽까지도 목소리를 죽일 줄을 몰랐다. 무슨 통신회사라는데 아마 당나라 통신회사인 것 같다.

 

새벽 4시경에는 떡라면 먹으라는 소리에 잠을 깼다. 마치 산장에서 자는 사람들 모두에게 떡라면이라도 대접하려는 듯이 예의 “김선생, 이선생.”을 찾으며 떡라면 먹으라는 소리에 잠이 깼다.

“씨팔 먹으려면 조용히 처먹을 것이지. 산장에 지네들만 있나. 선생은 무슨 얼어죽을 선생이야.”

잠이 깨 10여분 뒤척이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혼잣소리로 조금 크게 뇌까렸다.

그 소리 듣고 채 5분이나 잠잠 했으려나 또다시 떠드는 소리에 잠자고 있던 침상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어디 산장이나 여름 휴가철, 신정 일출맞이, 단풍연휴기간 미어 터져 나가는 것이 산장이다.

산장 예약제가 실시되고 있지만 워낙 등산인구에 비해 수용시설이 태부족이라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산장에서 숙면을 취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심지어 단풍철 주말에 밀려드는 산장 투숙객들로 자리를 빼앗길까봐 화장실도 못 가고 산장 한 구석에서 무릎을 세우고 밤을 세웠다는 얘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시 눈을 붙였나 보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일어나라는 흔들림에 잠을 깨어 보니 밤새 떠들던 40여명의 등산객들이 빠져나갔다.  밤늦게 오기로 했던 20여명의 등산객들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나마 밤중에 소란은 덜했다는 산장지기의 설명이다.

 

08:30 비선대 산장 출발

비선대에서 장군봉으로 오르는 까마득한 슬랩을 올려다보며 몇 년 전 저항령에 캠프를 치고 천화대다 적벽이다 바위를 하러 다니던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은 저항령 캠프장을 폐쇄해 설악동 야영장을 이용하고 들 있지만 저항령 캠프장은 정말 대단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고 안전벨트에 각종 확보물과 서브배낭을 매고 외설악의 이 골짜기 저 바위를 누비고 다니던 바위꾼들의 구릿빛 근육들, 대학산악부의 몸풀기 얼차려로 오리걸음을 하면서 골짜기를 뒤흔드는 힘찬 기합소리, 밤이면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 날 바위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비워나가는 술병이 저항령 계곡의 호박돌 수만큼이나 쌓이던 밤, 그렇게 설악과 술과 인생을 밤새워 얘기하다 새벽이면 어느덧 바위하러 나갈 준비를 하던 모습들.

 

금강굴 입구 쯤에 배낭을 내려놓고 철계단을 오른다. 비선대에서 포효하는 맹수의 그것 처럼 보이던 적벽이 발밑에 보이고 오버행에는 인공 등반으로 오르는 몇몇 파티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외설악 만경대로 이어지는 천불동 계곡을 보여주는 것도 잠시 그새 10월 초 아직은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더워진 바다는 이내 설악동 골짜기로 해무에 점령당하고 만다.

 

마등령. 해무에 싸여 시계는 20여미터에도 이르지 않는다. 오세암에서 묵은 보살님들이 딸랑이 배낭을 메고 마등령을 넘어 금강굴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텐트를 팩킹하기는 했지만 2박3일 일정의 부식 무게가 가벼워 갈 만 한데도 오름길은 마냥 더디기만 하다. 경상도 어디쯤에서 오신 비구니승려와 보살님들과 호흡을 같이 한다. 함께 한 보살님들의 나이는 40대 중반 참 곱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비구니승려도 우중충한 승복이 오히려 아웃포커싱에서 인물만을 더욱 돋보이게 하듯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계시다.

 

힘든 와중에도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고도를 높여도 보이는 것은 회색빛 해무에 가려 낙엽을 떨구는 신갈나무들 뿐이라 더욱 그런가 보다. 몇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마등령 아래 샘까지 다달았다.

 

‘ 배고프다.’

배고프다는 이 말에 일행은 긴장을 한다. 저혈당이 있는지 일단 배가 고프다고 생각들면 금방 얼굴이 허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와지는 것을 알기에 등산로에서 벗어나 대충 자리를 하고 씨레이션을 하나 까고 과일을 먹는다. 연휴의 마등령 오름길은 돗데기 시장 같다.

 

왼편 사태 지대를 지나서 얼마쯤 지나 또 허기가 진다. 당초 계획은 마등령 삼거리에서 점심을 할까 했는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적설기에는 그냥 지나쳤던 마등령 샘에서 떡라면으로 점심 요기를 했다.

 

마등령 삼거리에는 그 말많던 간이매점이 철거되고 1275 털보가 나지막하게 쌓은 돌담 뒤에서 커피 등을 팔고 있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볼 정도로 얼굴이며 체격이 약해져 있었다.

 

당귀차를 한잔 건네 받는데 손가란 대부분의 첫마디가 잘려져 나간 것이다.

‘ 아니 어쩌다가.’

 올 봄(2000년) 뒤늦은 폭설에 노루목에서 물치로 물건하러 걸어가다 그만 저체온증에 정신을 잃고 동사 직전 사람에게 발견되어 목숨은 구했지만, 동상걸린 손가락을 절단하게 됐다는 것이다.

 

 설악산에 80년대 후반쯤 들어와 산을 알만큼 아는 사람인데 그것도 산이 아니라 노루목 어디쯤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1275 샘에서 20리터 물 두통을 들고 매점까지 쉼 없이 오르던 강건한 체격의 소유자였는데 마치 오랜 풍상에 수액이 빠져나간 고사목 같은 그의 얼굴에서 이상한 빛이 읽혀진다.

 

관리공단에서 제재를 가한다 하여도 이 사람은 산에서 내려가서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바다고기를 민물에서 살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산행 중 남을 것 같은 부식 봉지와 여분의 담배 한갑을 건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1275 털보와는 오래 전 인연이 있었다. 혼미해진 그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1275 샘 바로 위 장군봉과 비상봉, 서북릉과 용아릉이 펼쳐지는 텐트 사이트에서 4일을 혼자 지낸 적이 있었다.

 

무슨 정신에서인지 텐트 안에서 소주를 마시다 바람소리가 두렵게 느껴져 헤드렌턴 하나에 의지해 미친듯이 불어대는 1275에 올라 오징어 배의 조명을 본 기억은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 일년 전 산행기를 쓰는 지금에도 오히려 그 때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기억이 된다.

 

신선대와 마등령을 오가고 1275 위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설악의 그 다양한 색채 변화를 눈을 통해 가슴에 담고 있었다. 저녁을 해먹고 나면 일체의 조명도 끄고 텐트 앞 마당바위에 앉아 고래 고래 노래를 불렀었다. 봄여름가을겨울과 양희은을.....

 

4일째 되던 날 오후 문득 김치찌게에 소주가 미치도록 먹고 싶어 마등령까지 왕복 3시간을 걸려 스팸과 600ml 경월소주를 사러 갔다 왔다. 시골에서 읍내로 장보러 가는 기분이 이럴것이다란 생각을 하면서, 공룡능선 상에서 만난 산꾼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기도 했었다. 코스가 길어 중형 배낭 이상을 메고 다녀야 하는  그 곳에 간단한 파일복 차림으로 훌쩍 훌쩍 날아다니는 내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끼고 아끼던 김치를 톡톡 털어 스팸을 먹기 좋게 잘라 넣고 끓인 김치찌게는 지금 생각하는 이 시간에도 군침을 삼킬 정도로 식욕을 자극했다.  1000미터대의 가을 설악 공기 만큼이나 알싸한 소주가 목 울대를 타고 넘어가고, 소주 한잔의 안주로 딱 좋을 만큼의 김치와 햄을 스푼에 얹어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친구들은 안정된 직장에서 가정을 꾸미고 미래를 설계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지리산에서 설악산에서 벌써 한달 여를 이러고 있다는 생각에 알지 못할 서러움 같은 게 북 받쳐 올랐다. 지금도 모를 일이다. 잊고 있던 나름대로의 야망, 좌절, 그로 인한 내 스스로에게서의 소외감, 어느 순간부터 빗겨나가기 시작한 과거에 꿈 꿔왔던 내 인생의 행로. 그런 것들이 복잡다단하게 뭉둥그러져 스스로를 일순간이지만 주체할 수 없게 만든 것이었을까? 지금도 그 감정 상태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는 그 길로 설악을 내려왔다. 1275 털보와는 당귀차를 나누며 삼결삽에 소주한잔하자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말을 던지고 말이다. 그 이후 혹한기에 한번, 어느 여름해 인가 한번 찾았다 눈인사만 하고 말을 건네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작년의 설악 단풍은 그리 곱지 못했다. 채 빨갛게 탈색이 되기 전 말라 비틀어졌으니, 하지만 산행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산행 초입의 일련의 기분 나빴던 일에도 불구하고

다만 카메라 건전지가 다해 그래도 아름다운 천불동의 가을을 담아오지 못한게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그 이후 설악을 못 찾고 있다. 지난 여름 난생 처음으로 가져봤던 그 어줍지 않은 생각으로 1275에 대한 염원은 간절했음에도 설악을 찾아야 되겠다는 염원에도 언제 찾게 될지 모른다.

 

무심코 noname01.hwp를 대하다 공룡능선 산행기라는 화일명을 열어보니 일년 전 쓰다 만 화일이 눈에 띄어 읽어내려가다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도 설악은 나에게 미완의 그것으로 남게 된다.

 

2000년 가을 설악 1275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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