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TRAIN/SOUL TRAIN

경포대 유리집

오체투지해무 2009. 5. 20. 13:12

 

 

 

 

 

추억 하나.

경포대 유리집을 처음 찾은 것은 한반도가 온통 올림픽의 기대로 달아오르던 1988년 5월의 일이다. 강릉 중앙시장 옆 자그마한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경포대행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시내 번화가를 향하다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처음 여자와 함께 떠난 여행.  차 한잔을 마셔도 그 고장 멋을 아는 토박이들이 찾는 그런 장소가 어디 있지 않을까 싶어, 지나는 여대생에게 물어 알아낸 장소가 경포대의 유리집이다.

 

 


사실 찾고 있던 곳은 신문에서 언뜻  강릉 예술인들이 종종 들린다는 클래식 카페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였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두 여대생은 발걸음을 멈추고, 장소를 묻는 한 쌍의 연인에게 눈을 반짝이며 유리집에 대해 설명한다.

 

 


" 경포대에서 내려 바닷가로 나가 해안도로를 타고 동해호텔 쪽으로 내려가면 횟집이 끝나는 데가 있거든요. 그 건물 이층에 유리집이 있어요. 강릉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안주도 저렴하고, 분위기가 좋아요. 유리창 너머로 바다를 보면서 두부찌게에 소주 한잔. 멋질 거예요. 그리고 잠은 요. 횟집 이층에 민박집이 저렴해요."

 

 


나와 눈을 마주치며 강릉 사투리 들뜬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숙박정보까지 알려주며 하루의 여정을 설명해준다. 얘기 중간, 잠깐잠깐 옆에 서 있는 친구를 보며 ' 너 참 좋겠다.' 하는 표정을 보인다.

 

 


" 좋은 여행 되세요."


 

 

가자는 친구의 말에 설명하던 여자의 얼굴이 싱글벙글하다.

 

 


" 참 재미있는 여자지?"

" 그런걸 뭘 물어보고 그래요. 창피하게."

 

 


낯 모르는 여자에게 아무 말이나 불쑥불쑥 건네는 평소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에 두 여자의 시선을 받는 심기가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 안 볼 사람인데 어때. 한잔을 해도 분위기 있는데서 하면 좋잖아."

 

 


그림을 그리는 이 친구와 차를 한잔 마셔도 아무데서나 마시지 않았다. 그건 만나는 첫날부터 통했다. 종종 만나는 장소로는 대학로의 '슈만과 클라라' '소금창고' 'ENO', 이대 앞의 '아브락사스' '성' 그리고 공중파방송에서 들을 수 없는 희귀음반을 틀어주는 몇몇 곳들.

 

 


경포대에 도착하자마자 강릉 시내에서 알아 낸 유리집이라는 장소로 가 점심부터 먹었다. 기대했던 것 보다 유리집은 카페라기 보다는 식당에 가까웠다.  전방의 유리창으로 동해바다가 펼쳐진다는 것과 한쪽 벽면에 LP판과 낙서집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꽂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 장식 없는 평범한 대중식당의 모습이었다.

 

 


점심 반주로 알콜 함량 25도의는 소주를 연거푸 3병은 비었다. 잔을 비우며 조지 윈스톤을 들었고, 비발디 류트와 현을 위한 협주곡, 박인희를 들었다. 술잔에 별이 부서진다는 대목을 들을 즈음에는 소주에 사이다를 탄 듯한 진토닉이 손에 들려 있었다. 아마도 드라이진이 아니라 쥬니퍼와 사이다를 섞은 듯 했다. 진 토닉을 유난히 좋아하던 둘은 프란시스 베이컨과 조르지오 데 끼리코를 얘기했다. 컵 주변에는 레몬 대신 귤이 예쁘게 꽂혀 있다.

 

 


B4 용지를 묶어 만든 낙서장에는 세상의 온갖 번뇌와 시름, 고통이 다 담겨 있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은 탓에 낙서장의 이야기는 권태에서 벗어나려는 쇼맨쉽 같아 보였다. 그들의 글 속에서 풍기는 뉘앙스 만큼이나 세상의 나락에 빠졌거나, 빠져 봤을 것 같지 않았고, 실제보다 과장되었거나, 직관력과 통찰력으로 자기 앞의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유행가 가사 같은 글귀에 호호깔깔 큰소리로 웃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아니면 샘이 났던지, 금방이라도 경포대 앞 푸른 바닷물에 코라도 박고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대단히 시니컬하고 염세주의자 같았던 기억 뿐. 오래된 행주에서 나는 쉰내 같은 그를 나두고 해변 모래 위로 나갔다.

 

 


5월의 경포대 햇살은 한 여름 만큼이나 강렬했고, 시퍼런 바다 위를 달려온 바람은 햇볕과 술기운에 달아 오른 얼굴의 열기를 식히는데 충분했다. 육지가 끝나는 곳과 바다가 시작되는 곳에 앉아 헤드폰으로 전원교향곡을 들었다.


 


 


추억 둘.

90년 혼자 찾은 경포대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리집 통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바다가 눈을 통해 허파꽈리에 가득 찰 때 즈음, 모래사장을 힘겹게 걷는 여자가 한 명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말이라도 건네지 않으면 허파꽈리에 가득한 바닷물로 인해 익사하고 말 것 같았다.

 

 


이층 유리집 계단을 내려가, 이차선 폭의 해안도로를 건너서, 빨간 자전거가 세워진 카페 앞을 지나, 저만치 모래사장 위를 힘겹게 걷던 여자가 발치에 들어 왔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여자는 이내 귀찮다는 듯, 굽이 뾰족한 구두를 모래 깊숙이 박았다가 빼는, 힘든 걸음 끝에 빨간 자전거가 세워진 카페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칫 그 남자 짝이 날 뻔했던 나는 해변의 북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육지의 끝과 경포대 앞에 떠 있는 오리바위가 가장 짧은 직선거리에 있는 해변에 앉았다. 이 년 전 전원교향곡을 듣던 그 자리이다.


 

 

 이미 나는 많이 취해 있었다. 바닷바람은 눈썹과 귓가를 어루만지듯 스치고 지나간다.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파란 하늘과 수평선, 하이타이 거품 같은 파도의 포말, 노을 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보이던 모래사장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몹시 춥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이 깼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던, 그 모래사장에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 날 밤 강릉 시내 포장마차 촌이 밀집한 허름한 골목길에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과 죽지 않을 만큼 술을 마셨다. 누구와 마셨는지도 어디로 어떡해 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파타야의 밤거리를 거닐 때 느꼈던 기시감은 강릉에서의 그 기억 때문인 듯 하다.


 

 

깨어 난 곳은 상당히 깨끗한 여관. 방배동 어디쯤이거나, 의정부 어디쯤의 여관이라고 착각했다. 마치 사차원 세계로 빠져, 순간 이동 한 듯 나는 간밤의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 기억을 해내야만 했다. 여관 문을 나서니 강릉 중앙시장 옆에 위치한 꽤 유서 깊은 여관이다. 나는 방황을 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 숙취가 올라왔다. 숙취로 인해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자그마한 못대가리와 실로 묶여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풍선처럼, 바람 부는 데로 쓸려 다니는 같았다. 끊어진 필름을 잇기 위해 시장 골목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포장마차 촌은 발견하지 못했다. 경포대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이년 전, 여대생들에게 길을 물었던 그 자리에서 딱 그 나이 또래의 여자가 경포대 가는 버스편을 물어왔다. 내가 타는 버스를 타면 된다고 알려줬다. 당시의 강릉버스는 뒷문으로 타고, 앞문으로 요금을 내면서 내리게 되어 있다. 나는 중간쯤에 앉았고, 여자는 내 뒤쪽 두 명이 앉게 되어 있는 좌석에 앉았다.

 

 


경포대 회차 지점을 한 정류장 앞두고, 경포대에 가려면 어디서 내리는 거냐고 묻는다. 함께 내리면 된다고 알려줬다. 나 보다 먼저 내려서는 무엇에 쫓기듯이 한쪽으로 쏠리는 듯한 걸음으로 여관과 음식점이 밀집한 거리로 앞서 갔다. 긴 머리, 금테안경, 약간 동그란 계란형의 하얀 얼굴, 커다란 눈에 꽉 찬 검은 눈동자 속의 불안정한 기운, 갓난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차라리 푸른 흰자위, 어눌한 강원도 말씨. 바다를 보러 온 학생인 듯 한데...

 

 


" 학생... 학생... 바다 보러 온 거 아니에요?"

" 네, 바다 보러 왔어요. 이쪽으로 가면 바닷가 가는 길 아니에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서는 얼굴에 후광이 인다.

 

 


" 이쪽으로 가야지. 경포대 바닷가 가려면, 나랑 같이 가요. 나도 바닷가 가는 길이니까."

 

 


아무 말 없이  그 예의 한쪽으로 쏠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내 뒤쪽에 따라 붙는다. 정류장에서 바다가 보이는 경포대 알림판 아래까지는 채 500미터가 되지 않는다. 걷는 동안 나는 어제의 일들을 모래 속 같은 숙취를 헤치고 찾아내야 했고, 그래서 우리 둘은 걷는 내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바다가 보이고, 모래사장에 발을 들여놓자 어리둥절하던 여자의 표정에 밝은 미소가 감돈다.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불안한 기색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잠들었다 추위에 깼던 그 모래사장이다. 이년 전 헤드폰으로 전원교향곡을 듣던 그 자리이기도 하다.

 

 


" 혼자서 바다 보러 온 거예요?"

" 예."

" 아침은 들었어요?"

" 아직 이요."

" 나도 아직 식사 전인데, 저기 가서 같이 먹을래요?"

" ......"

"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그래요. 배고플텐데 같이 먹어요."


 

 

 


유리집에 들어가 늦은 아침과 이른 점심을 함께 먹었다. 어려 보이는 나이와는 달리, 따라 주는 소주를 연거푸 마신다. 어제의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내다보이는 해변가 카페에 기대어 있는 빨간 자전거. 굽이 뾰족한 신발을 신고 힘들게 해변을 걷던 여인. 황금빛에 물들은 모래사장과 해변의 사람들. 수상가옥 같이 지어진 허름한 포장마차를 향해 가던 길과 어떡해 여관에 찾아 들었는지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이런 경험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그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는 집착이 가시기 전 까지 몹시 불안해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얀 얼굴의 여자는 낙서장을 꺼내어 꼼꼼하게 읽어본다. 읽고 있는 그녀가 얼굴을  잠깐 들어 눈동자라도 보이면, 마치 갓 잡은 생선의 등지느러미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 했다.


 

 

조지 윈스턴을 듣고, 박인희와 양희은의 봉우리를 찾아 듣는다. 유리집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자기가 찾아 듣게 되어 있었다. 둘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뒤로 카페 ' 윌 ' 에 갔었고, 기타를 치며 70년대 포크송을 들려줬고, 그녀는 반주와 함께 찬바람이 불면을 불렀다.

 

 


그 날밤 늦게 동해시에서 북평역 쪽으로 가다 중간에 보이는 무릉여관에서 잤다. 그리고도 둘은 묵호항 재개봉관에서 천녀유혼을 보고, 은행에서 돈을 찾아 밥을 먹었다. 윤회에 대해,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해, 그리고 느끼고 있지만 알고 있지 못하는 것에 얘기하려고 많은 술을 마셨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우리는 묵호의 신흥 아파트촌 인근에 세워진지 얼마 안된 모텔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두 번의 밤과 세 번의 아침을 맞았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과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램. 자리로 돌아갔을 때 내 자리가 온전히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을 서로 떨쳐 버리려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만 했다. 그리고 추암으로 향했다.

 

 


삼척과 동해를 오가는 7번 국도, 추암 입구 주유소가 건너편에 우리는 내렸다. 논과 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70년대 초, 식구들과 이곳을 처음 찾았던 이야기를 들려줬고, 어릴 때 슬펐던 일을 이야기를 해줬다. 마을로 들어서야 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굴다리는 어릴 때 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다. 촛대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우리들뿐이 없었고,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녀는 바위에 기댄 채 눈을 반짝이며, 자기는 캠퍼스 커플이라고 했다.

 

 


이렇게 모르는 남자와 같이 있어도 되냐는 질문에 그 책임은 남자친구에게 있다고 했다. 나는 말이 안된다고 했고, 그녀는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여자가 안아달라고 했을 때 해안경비를 도는 장교와 사병 몇몇이 언덕 위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70년대 초 가족이 민박을 했던 추암의 길 모퉁이 가게에서 라면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 남자친구가 많이 걱정할거라고 했다. 나도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 왜 삼일 동안 같이 지내면서 이름을 묻지 않아요?"

" 그건 너도 묻지 않았잖아."

" 그럼 우리 서로 신분증을 교환해서 볼까요?"

" 민쯩을 까보이자는 얘기인데, 그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야."

" 재미있잖아요. 내 것 먼저 보여줄게요."

 

 


학생증을 받고, 주민등록증을 내 주었다. 민간인들끼리 신분증을 교환해 보기는 살다가 처음 있는 일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대학생이라 성인인지 알았는데, 주민등록 상 미성년자다.

 

 


" 미성년자잖아."

" 학교를 일년 일찍 들어가서 그래요. 그 보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불편한 표정이다. 아니 잠시 만감이 교차하다 실망스럽다는 표정이다.그 표정은 무슨 의미냐는 내 눈길에

 

 


" 같은 동네네요, 지하철 타고 다닌다고 했죠. 북부역"

" 김충복베이커리."

" 맞아, 김충복베이커리."


 

 

이름을 알게 되고, 사는 곳을 알게 되자 상대에 대한 신비감이 일순 사라졌다. 둘은 동시에  관계의 허무함을 깨우치게 되었지만, 몸소 체험하기에 추암이라는 바닷가는 특별한 곳이었다.

 

 


 

 

자주 버스가 다니는 7번 국도까지는 30 여분을 걸으며, 길가에 빨갛게 열린 감나무 가지를 꺾었다. 학교 기숙사에 걸어 놓는다고 했다. 7번 국도까지 걸어 나오며, 함께 걷는 마지막 길이라고 생각됐다. 다시 만나면 왠지 안될 것만 같았다.  아직 우리는 현실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우리는 낙원에 있는 것이다. 이별에 대한 슬픔을 느끼면 안됐다. 그래서 노래를 했다. 춤도 췄다. 강릉행 버스를 타고 강릉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학교가 있는 춘천행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나를 만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 이 다음에 나는 시골 학교 분교 선생님으로 발령 나서 근무 할 거에요. 그때 초대하면 꼭 와야돼."

" 그때 되면 결혼할거 아냐. 그리고 시골학교 선생님은 지역유지인데, 결혼할 남자도 아닌데 찾아오면 안 좋은 소문이 금방 날 걸."

" 괜찮아."


 

 

가을이 깊게 내려앉은 국도 주변은 이제까지 보던 그 어느 해의 단풍보다 화려했고, 파란 하늘의 강렬한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춘천 가는 길 위에 버스는 때로는 심하게, 때로는 기분 좋게 뒷좌석에 앉은 우리 둘을 이따금씩 흔들어 줬고 밀착 시켜주었다. 버스 안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강릉이 멀어지고, 춘천이 가까워 올수록, 나를 만지는 그녀의 손길은 잦아졌다. 버스 좌석에 앉아 나누는 키스는 불편했지만, 입술은 부드러웠으며,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는 애절했다.

 

 


춘천 터미널에서 나를 배웅하는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이려는 것과는 달리 눈망울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이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버스가 어두워진 고속터미널 승차대를 떠나는 순간 그녀는 왼손으로 입을 막고, 오른팔을 높이 들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에필로그

그 후 경포대를 찾을 때마다 먼발치에서 변함 없는 유리집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 해 유리집은 문을 닫았다. 이렇다하게 카페도 없던 80년대부터 계절에 관계없이 주말이면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던 경포대에서 그만큼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가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상실감을 금치 못했다. 마치 오래 전에 살았던 집이 재개발로 없어졌을 때의 심정이랄까.


 


 2002년 초 작가 몇몇이 경포대를 찾았다.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와 카페 윌의 윤천금 사장을 만나기 위해 횟집 앞 도로변을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없어진지 알았던 유리집이 그 자리 그대로 그 촌스런 장식전구를 반짝이며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일행을 뒤로하고 한달음에 바깥으로 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열 평이 좀 넘던 대중식당 분위기의 유리집이 아니었다. 주방이 훤히 보이고, 바다 반대쪽으로 규모가 대폭 늘어났다. 세월이 흐른 만큼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낙서장의 규모도 커졌다. 많지도 않던 LP판은 그대로 이지만, 턴테이블이 없어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진토닉 한잔을 시켰다. 오래 전 진토닉 맛을 낼 수 있을까. 어울리지 않게 혼합된 진과 토닉워터의 함량은 그 옛날의 향수를 더듬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88년의 낙서장을 찾아봤다, 찾을 수가 없었다. 90년도의 낙서장을 찾았다, 있다. 당시 적어놨던 내 낙서는 볼 수가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젊은 친구에게 옛날 낙서장 그대로 보관되어 있냐고 물으니, 아마 그대로 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낙서는 90년도의 낙서장에서도 93년, 94년도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니 그 년도의 낙서장 어딘가에 있었는데 흥분된 마음에 내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올 겨울 들어 부쩍 자주 오는 눈발을 보면서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오르고 싶은 산도 많다. 유독 경포대 유리집 창가에 앉아, 바다로 부질없이 녹아드는 눈발을 내내 바라보고 싶다.



                                                                    2005.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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