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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직도 가야할 길" 줄인 글

오체투지해무 2012. 11. 1. 16:44

아직도 가야할 길

스캇 펙


Ⅰ 훈련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


삶은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문제만 가장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왜 다른 사람들은 당하지 않는데 자신과 가족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만 이같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불평한다.

☞ 많은 사람들은 힘든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동의가 될 듯한데, 그렇지 않은가요? 민중의 아픔을 어쩌고… 하면서 우리 그렇게 살아가자 하면, 동의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가만히 보면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기도 하는데 이때, 그의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고 하지요. 나아가 싫어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불행하다고 여기는 거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불편한 대화를 나누는 관계를 좋지 않은 관계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해서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기를 회피하는 경우가 훨씬 많죠. 좋은 글은 읽고 나서 적절히 불편해야 하고 좋은 관계 역시 적절히 불편한 관계가 좋은 관계라고 하기도 합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동의가 되는 말입니다.

동화에서 생각나는 것 하나, 어떤 사람이 절대자 앞에 가서 불평을 하면서 이제 힘들지 않고 행복한 생을 살고 싶다며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절대자가 말했습니다. 해결 방법을 말해주겠다. 네가 살고 있는 동네에 가서 걱정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서 삶아 먹으면 행복한 생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과는요? 겨자씨를 끝내 구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동네 사람들도 다 나름의 크고 작은 걱정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는 평범한 사실이 주는 위안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듯이 사람이란 성장을 위해 고통이 필요하다고 하지요. 그 고통을 외면할 때 사람은 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카를 융 Carl G. Jung은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라고 표현했습니다. (21쪽 하)


그러나 결국에는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고통보다도 피하려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진다. 신경증 그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과 문제들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이는 신경증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고통을 이겨내고 건전하게 겪어 내는 수단이란 어떤 것인가? 이게 ‘배움’이라 합니다.


즐거운 일은 나중에 하자


대단히 기본적인 것인데 이것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겠지요.

아이들에게 제목처럼 훈련을 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 보입니다.

스티븐 코비의 말

중요한 것을 먼저 하라는 말은 충분히 곱씹을 가치가 있습니다.

쉬운 일과 어려운 일,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 급한 일과 덜 급한 일 이런 것이 두개 이상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한 일을 먼저 한다고 합니다. 언젠가 어떤 선배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10년을 참 바쁘게 살아 왔노라고. 그런데 10년이 지난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을 먼저 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한 일을 중심으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진척이 없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 매번 급한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일을 놓치게 되면, 급한 일은 자꾸 더 많이 생기고, 악순환이 되어 점점 더 급하게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아이들과 수업 중에 기억에 나는 것이 있습니다. 쉬운 일과 어려운 일 여럿이 있을 때, 보통 청소년들은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진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해서 사례까지 들어가며 상황에 맞게 잘 설명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런 부모가 문제다


버릇없는 아이들을 보면 가정에서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버릇없는 아이들은 자라면서 혹독한 처벌을 더 자주 받는다. 이렇게 혹독하게 벌을 주는 훈육 방법은 무의미하다.

부모는 아이의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모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소위 무질서 가정에서도 사랑이 있으면, 아이가 훌륭할 수 있고

소위 반듯한 가정에서도 사랑이 없으면, 아이가 문제아로 자란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사랑이 전부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그들 자신의 마음 깊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자신이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느낌은 정신 건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며,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다. 이것은 부모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신념은 어렸을 때 얻어져야만 한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통해 자기들이 귀중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되어 파란곡절을 겪더라도 그러한 정신은 파괴되지 않는다. 스스로 귀중하다고 느끼는 그런 감정이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 된다고 했는데, 자신이 귀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돌보고 가꾸게 마련이다.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문제는 직면해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에 장애가 되고 만다.

방치해 두면 더 심각해질 뿐이며 해결도 훨씬 어려워진다.


책임진다는 것


☞ 토론지점 1.

책임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노이로제와 성격 장애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대개의 환자들은 모두가 노이로제(신경증)가 아니면 성격 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두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임지는 것에 대해 병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삶의 문제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이들은 서로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너무 책임을 지려고 하고, 성격 장애인 사람들은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신경증 환자는 세상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자기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격 장애의 사람들은 세상과 대결할 때 세상이 잘못됐다고 치부해 버린다.

“신경증 환자는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굴고, 성격 장애자는 자기 이외의 사람들을 모두 못살게 군다”라는 말이 있다.

격언 :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회피할 때, 그 책임을 다른 어떤 개인이나 조직 등에 떠넘긴다. 이것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가 억압적인 태도로 아이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자발성과 선택 능력을 제대로 기르지 못하게 된다.

☞ 생각지점 1

 “대다수의 환자에게서 존재하는 ‘무기력함’은 자유에 대한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 생겨난다.”고 하는데 진정 그런가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책임질 줄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사실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고 하는데 이 지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에 충실하자


우리의 삶이 진실하게 되고 정신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방법은 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이란 현실 그대로다.

현실에 대한 견해를 지도(地圖)라 한다면, 현실을 감수하고 파악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지도는 정확해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의 지도는 조그맣거나 대강 그려져 있으며, 세상에 대한 견해란 협소하고 오해로 가득 차 있다.

중년 말기에 가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의 지도가 완전하고, 그들의 세계관이 정확하다고 확신하여, 새로운 정보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지친 듯이 보인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죽을 때까지 현실의 미궁을 탐색하여 세계에 대한 이해와 진실이 무엇인가를 더욱더 넓히고 정리하며, 재정리하고 있다.

지도 제작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데 있다. 현실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사람은 어렸다가 어른이 되고 노쇠해진다. 가난할 때와 부자일 때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정보가 쌓여 본격적인 개정을 해야 할 경우 그 과정이 괴로운 일이고 고문 받는 것처럼 고통이다.


전이 : 낡은 지도


현실을 보는 낡은 견해에 고집스러운 집착을 보이는 것은 더 심각한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된다. 정신과 의사들은 이를 일컬어 전이(轉移)라 한다. 이 전이에 대한 정의는 정신과 의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저자의 견해는 어린 시절 형성된 세계관이 어린 시절의 환경에는 매우 적합하나 변화된 어른의 환경에는 적절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것을 그대로 옮겨 적용하는 것을 전이라 한다.

전이가 나타나는 증상은 깊이 내재되어 있어 파괴적이지만 대개의 경우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68 프로그래머 사례)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는 피하게 마련이다. 우리 자신의 지도를 개편하려면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런 훈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현실의 진실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불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정신 건강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오늘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과감히 도전하자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로 이는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게 된다. 따라서 세상을 알려면 우리는 세상을 잘 살펴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세상을 살펴보고 있는 자신을 살펴봐야 한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세상을 신중하게 고찰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고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위험의 근원이 우리들 안에 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단한 자기 성찰과 사색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외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내적으로 성찰하는 것에 비해 고통이 적다.

개인뿐만이 아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도 도전받지 않으려 하며 자신들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 통례다.

정신 치료를 ‘정직 게임’ 또는 ‘진실 게임’이라고 한다.


진실을 숨기는 것


(91)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능력은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나온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파악할 때 대체로 우리는 과대평가보다 과소평가하기가 쉽다.


균형 잡기


‘균형 잡기’란 우리에게 융통성을 주는 훈련이다.

분노는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

균형 잡는 훈련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다.


정상적인 우울증


철저한 정신치료의 기간은 집중적으로 성장이 되는 기간이어서, 이 동안에 환자가 경험하는 변화들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 동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을 위해서는 이에 맞먹는 양의 ‘낡은 자신’이 포기되어야 한다. 이는 성공적인 정신 치료를 위한 불가피한 요소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은 필수다. 그러므로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면, 그 우울증은 비정상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은 오래 계속된다. (병적 우울증은 포기 과정에 어떤 장애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포기와 부활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인간 자신을 포기하고 생명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우리 존재가 하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중략…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는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끝없는 인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이 바로 모든 생의 의미와 더불어 생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 중심의 지혜다.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많이 얻게 된다. 자기 훈련이란 자기 확장의 과정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탄생이다. 죽음의 고통이란 생산의 고통이고, 생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다.

인간은 살아가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체험할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죽음들도,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고통들도 체험할 것이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불교 신자들은 석가의 고통을 무시하고,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을 잊고 있다.

균형을 잡는 훈련과 그 근본이 되는 포기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당신은 포기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 당신이 이긴 적도 없으면서 이기기를 포기하면 당신은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실패자인 것이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정체감을 포기하기 전에, 어쨌든 먼저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 놓아야 그것을 잃을 수도 있다.

 

<진행 순서>

1. 기억하고 싶은 좋았던 구절이나 공감 가는 부분에 대하여 각자 이야기를 나눕니다.

2. 토론 지점을 잡아서 토론을 합니다. (제안하는 토론 지점은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3.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은 부분에 대하여 제기해 해봅시다.



■ 김남주 -사랑 1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Ⅱ 사랑 1


사랑이란 무엇인가


훈련이란 인간의 정신적 발달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지금부터 훈련하도록 격려해 주는 동기는 과연 무엇이며 또 무엇이 그것을 추진해 나가게끔 힘을 주는가에 대해 살펴보겠다. 저자는 그 힘의 정체를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 :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① 사랑의 목적은 정신적 성장이다.

② 사랑은 하나의 순환적 과정이다.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진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자신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확대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전보다 엄청난 존재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동이 타인의 성장을 목적으로 할 때도 사랑의 행위는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진화 과정이다.

③ 사랑의 정의는 남을 위한 사랑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도 없다. 또 자기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녀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자라도록 훈련시킬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기 훈련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훈련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궁극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④ 자기 자신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노력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표현되며,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때라야만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다. 참된 사랑이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서(또는 자신을 위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사랑은 노력 없이는 안 된다. 사랑은 무척 힘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되는 만큼만 사랑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약간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저자는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고 결론짓는다. 사랑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며, 의도와 행동이 결합된 결과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 혼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사랑에 대하여 어떤 신비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에 대한 혼돈된 인식은 모든 사람에게 괴로움을 준다. 따라서 사랑이 아닌 것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검토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밝혀 보기로 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가장 강하고 많이 알려진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또는 적어도 사랑의 표시라는 신념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주관적으로 참된 사랑의 경험으로서 대단히 강하게 경험되므로, 이런 그릇된 인식은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에 확실히 느끼는 것은 ‘나는 그녀를(그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① 첫 번째 문제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특별히 성적인 것과 관련된 애욕의 경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또는 친구를 아무리 사랑할지라도 아이들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성적으로 자극되었을 때에만 사랑에 빠진다.

② 둘째 문제는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예외 없이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의 특징인 황홀한 사랑의 느낌은 언젠가는 지나가게 마련이다.


사랑에 빠지는 현상의 본질은 개인의 자아 영역의 일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자신의 자아 영역과 다른 사람의 자아 영역이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126)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사랑에 빠지는 행동은 일종의 퇴행이다.

한 쌍의 연인이 사랑에서 빠져나올 때 그들은 비로소 참사랑을 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참사랑은 사랑의 느낌에 뿌리는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참사랑이 아닌 이유

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의지적인 행동이 아니다.

② 사랑에 빠지는 일은 한 개인의 한계나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자아영역의 붕괴다. 한 개인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데는 반드시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 없다. 참사랑은 영구적인 자기 확장의 경험이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렇지 않다.

③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그 사람의 정신적 발전을 북돋아 주는 일은 없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 마음속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에 종지부를 찍고 결혼을 통해서 그 결과를 보장받고자 하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분명히 정신적 발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 토론지점 1

사랑에 빠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인가 아닌가? 나중에 나오겠지만, 그렇다면 사랑이란 뭔가?

좀 좁혀보면 부모가 아이들을 사랑하고, 교사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토론해 보자.

사랑에는 영역이 있다. 에릭 프롬처럼 뭇 사람(이웃)에 대한 사랑,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자기에 대한 사랑, 이성에 대한 사랑 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 사랑의 공통점과 이성간 사랑만이 갖는 특징은 무엇인지 토론해도 좋을듯하다.

※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 참고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신화


☞ 작은 질문 : ‘하늘이 정해 준’ 사람을 만날 때에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가?

낭만적인 사랑이라는 신화가 실재로 얼마나 강렬하게 퍼져있는가?

완전한 결혼 생활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소개한 오닐 부부의 책 ‘개방적인 결혼생활’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사랑은 자아영역을 확대하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참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단언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참사랑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경험이라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잘못된 신념은 그것이 그만큼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참사랑을 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크고 신비로운 전체 구도의 일부분일 뿐이다.

열반, 깨달음, 정신적 성장 등은 오로지 참사랑을 부단히 실천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의존성을 경계하라


사랑에 관계된 두 번째 그릇된 개념은 의존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살고 싶지가 않아. 나는 우리 남편(또는 아내, 애인 등) 없이는 살 수 없어. 나는 그를 무척 사랑해”

“당신이 말하는 것은 기생충의 생활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당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의존하여 기생하는 식객입니다. …중략…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답니다. 하지만 더 잘 살기 위해 상대방과 함께 살 것을 선택하는 것이죠.”

☞작은 질문 1 : 위 문장에서 강조점을 찾는다면 그 단어는 무엇인가요?

그들은 누구에게 의존하든지 의지할 사람이 있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의 자아 정체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자아 정체감을 줄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구든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을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걸 성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확실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건전한 결혼은 오직 강하고 독립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의존은 사랑의 결핍에서 시작된다. 이런 경우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과 관심과 돌봄이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꼭 달라붙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활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변해 결국 자신이 집착했던 관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랑과 훈련은 서로 손을 잡고 같이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애착


의존적인 사람은 만족과 행복을 갈망한다. 그러나 성장과 그에 수반되는 불행과 고독 그리고 고통은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의존할 상대인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랑이란 정신적 성장과는 무관한 애착, 다시 말해 단순한 정신 집중이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나 애착을 갖고 있는 것들의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남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현명함과 우둔함, 선과 악,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좀 더 엄밀하게 정의를 내리면, 우리는 인간만을 사랑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인간만이 근본적 성장을 할 수 있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완동물이 대들면 버린다.

애완동물의 마음이나 정신의 발달을 위해 보내는 유일한 학교는 복종 학교다.

애완동물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기른다. 애완동물이 자라서 집을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

애완동물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이유는 단지 애완동물만을 사랑할 줄 알고 다른 인간을 순수하게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가장 비참한 것은 수많은 여자들이 아이를 단지 자신의 어린아이로서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나타내기 시작하자마자 어머니의 사랑은 중단된다. 그래서 귀찮은 존재로까지 여기게 된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 무렵 어머니는 다시 임신하고픈 욕구를 느낀다. 이것은 또 다른 아기, 즉 다른 애완동물을 얻기 위해서다. 이런 아이가 자라나서 성년기에 들어갈 때 우울증에 빠지거나 동시에 수동적 의존성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자기희생이라는 오해


분별없이 주기만 하는 파괴적인 양육의 이면에는 많은 동기가 숨어있다. 공통적인 근본원인에는 ‘주는 자’는 ‘받는 자’의 정신적인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 마조히즘적인 사랑을 한 목사와 그 가족의 사례를 통하여 가져야할 교훈이 있다면? (두 아들은 대학을 그만두고 정신과 의사의 진찰을 받고 그의 부인은 만성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음)

사랑은 자신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대인 것이다. 사랑은 자신을 위축 시키기 보다는 확대시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사랑이란 하나의 행동이고 활동이다. 사랑에 대한 마지막 그릇된 오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이란 느낌이 아니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애정 있고 건설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 사람에게 전혀 사랑을 느끼지 않아도 때론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베푼다.

사랑의 느낌은 애착을 수반한다. 애착 과정을 통해 하나의 상대가 우리에게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애착을 하게 되면 그 상대를 보통 ‘사랑의 대상’이라고 부른다.

사랑이 느낌이라고 믿는 오류는 ‘애착’과 ‘사랑’을 혼동하기 때문에 생긴다.

사랑과 애착은 비슷해 보이지만, 뚜렷한 차이가 있다.

① 생명과 영혼의 유무에 관계없이 애착을 한다.

② 우리가 다른 인간에게 애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이 정신적인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존적인 사람은 자기가 애착하는 대상의 정신적인 발전을 두려워한다.

③ 애착의 강도는 지혜나 책임 의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④ 애착이란 둥둥 떠 있는 것이고 순간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진정한 사랑은 책임과 지혜가 따른다.

진정한 사랑은 애착을 초월한다. 참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실존한다. 물론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 하는 사랑이 훨씬 재미있고 수월하다. 그러나 애착과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 이를 구별하는데 있어서 열쇠가 되게 바로 ‘의지’이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적이기보다는 의지적인 것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사랑하는 느낌이 없어도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와 행동은 있을 수 있으며, 있는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느낌으로 행동하는 것을 때로는 억제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느낌에는 제한이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작은 질문 2 : 이 말이 무슨 의미이며 진짜 그런가?


자신의 감정 속에서 사랑한다는 느낌의 증거를 찾는 것은 쉽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행동 속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참사랑이란 의지적인 행동이며 그것은 사랑의 순간적인 느낌이나 단순한 애착의 단계를 초월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랑이란 행동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진행 순서>

1. 기억하고 싶은 좋았던 구절이나 공감 가는 부분에 대하여 각자 이야기를 나눕니다.

2. 토론 지점을 잡아서 토론을 합니다.

3.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은 부분에 대하여 제기해 해봅시다.



Ⅱ 사랑 2

지금까지는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는 어떤 것이 사랑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사랑은 깊이 관심을 갖는 것


사랑은 우리 자신들의 확대를 요구하기 때문에 언제나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행동을 하면서 노력과 용기가 가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행동이 아니다. 여기에 예외란 없다. 떡 본 차에 제사지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 주는 것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잘 듣는 방법을 훈련시키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듣는 일을 잘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도록 해야 한다. 잘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척 힘든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들을 줄을 모르는 것은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했거나 잘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 살짜리 아이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이유 : 아이에게 그렇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존중감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관심과 존경심을 보여주면,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성장은 물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다.

당신은 딴생각을 하면서 이이하고 짝짜꿍을 잘할 수는 없다. 만약에 당신이 반쯤 정신을 팔면서 짝짜꿍을 한다면, 당신은 반쯤은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산만한 아이를 갖게 될 지도 모른다.

부모가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자라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삼십대의 능력 있는 전문가가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다가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스물두 살 때 쓴 대학졸업 논문을 읽지 않은 사례.)

참으로 들어 주는 일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대개의 부부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가슴을 열고 마주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이 일상이 되면, 비로소 부부의 결혼 생활에 성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신과 상담 사례에서 1/4은 문제의 근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극적인 진전을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의사가 자기 말을 참으로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환자 중에는 생전 처음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사랑이란 부지런한 자만이 성취할 수 있으며, 사랑하지 않음은 곧 게으름을 피우는 것과  같다.


상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사랑을 실천(자아를 확대?성장시키는 것)한다는 것은 타성에 젖어 게을러지는 것을 경계(노력)하고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용기)을 필요로 한다.

☞ 작은 질문 1 : 위의 문장에서 나에게 부족한 단어에 밑줄을 그어보자. 이를 서로 비교해보자.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또한 서로에게 격려를 보내보자)

사랑의 실천에서 사랑의 용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우리가 자신을 확대하는 것은 말하자면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변화하고자 한다면 두려움은 불가피한 것이다. (두려움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실제 많은 사람들은 회피한다.)

정신적 성장이든, 사랑이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하 全文)

당신이 교회에 규칙적으로 다니는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십대 후반의 한 여인이 예배 시작하기 5분 전에, 눈에 띄지 않게 예배당 뒤쪽 항상 같은 자리에 와서 앉는다. 그녀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조용히 그리고 재빨리 다른 교인들이 나오기 전에 그리고 목사님이 교인들과 악수를 나누기 위해 계단으로 나오기 전에 사라진다.

만약 당신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걸고-그것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예배 후 커피를 마시자고 초대한다면 그녀는 공손히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당신의 눈을 피하며 약속을 핑계로 급히 서둘러 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무슨 약속인지 그녀를 따라가 보면 곧장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집에는 항상 창문에 덧문이 쳐 있어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고, 밖에서 돌아온 그녀는 열쇠로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살펴보면 그녀는 어떤 큰 사무실에서 보조 비서로 일하고 있으며, 말없이 맡은 일을 받아서 정확히 타자를 쳐서는 끝낸 일거리를 두말없이 돌려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그녀는 점심은 자기 책상에서 먹고 친구는 하나도 없다.

그녀는 집에 가는 길에 항상 들리는 슈퍼마켓에서 몇 가지 필요한 것을 사 가지고는 다음 날 출근하기 전까지는 자기 집 문 뒤로 사라져 버린다. 매주 토요일 오후엔 새로운 영화를 상영하는 집 근처 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를 본다. 그녀는 유일한 친구로 TV를 가지고 있으며, 전화벨이 울리는 일은 거의 없고 편지를 받는 일도 없다. 당신이 우연히 그녀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겨 그녀에게 생활이 외로워 보인다고 말하면 그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는 고독을 즐기고 있다고……. 당신이 그녀에게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자기가 퍽 좋아하던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8년 전에 죽어서 이제 아무것도 그 개를 대신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그녀의 마음의 비밀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삶은 오로지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것만이 목적이며 자아 확대는커녕 움츠러들기만 한 나머지 거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떤 생활에도 애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순히 꼭 잡고 놓지 않는 것(애착)이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그 애착을 초월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랑은 시작을 위해서 무엇인가 잡는 것(애착)을 요구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잡으려면 거기에는 항상 잃어버리거나 거부당할 위험도 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랑을 거부하고 떠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 보라. 사람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그것들은 언젠가 죽는다. 누구든지 믿어 보라. 당신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든 의존을 해 보라. 그가 당신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애착은 고통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많은 것들을 삶에서 제외시켜야만 할 것이다. 즉, 아이들을 갖는다든지, 결혼, 섹스의 황홀감, 야망, 우정 등 인생을 생기 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하고 중요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말이다. 어떤 면으로 성장을 하든-그것이 고통이 되든지, 기쁨이 되든지-그것은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될 것이다. 충만한 생활은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든지 아니면 삶을 완전히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의 본질은 변화, 즉 성장과 쇠퇴로 만든 한 벌의 투구와 갑옷이다. 생과 성장을 선택하라. 그것은 변화와 죽음의 가능성을 함께 선택한 것이다. 고독하게 살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보이는 그 여인의 폐쇄된 생활은, 그 원인이 여러 번에 걸친 죽음이라는 체험이다. 그녀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두 번 다시는 그 아픔을 겪지 않으려고 충만한 생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죽음의 경험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성장과 변화를 피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새로운 것, 기대하지 않던 것, 모험이나 도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항상 변화 없는 생활을 선택했다. 이미 말했던 대로 정당한 괴로움을 피하려는 시도는 모든 심리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


대개 정신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죽음의 현실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 문제를 갖게 된다. 놀라운 일은 정신과 연구 문헌에서 이런 현상의 의미를 고찰해 보려는 노력이 최근에 들어서야 시작되었다. 죽음이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우리의 ‘왼쪽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것임을 충분히 느끼고 살아간다면, 죽음이란 우리 삶의 진실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두렵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교훈의 샘물이 되어 줄 것이다. 죽음의 교훈을, 즉 우리가 살고 사랑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시간을 최선으로 이용하고 생을 최대로 충만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왼쪽 어깨 위에 짊어진 죽음의 실재를 부인하고, 당당하게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이 주는 지혜로운 교훈을 스스로 버린 결과, 현명한 지식을 가지고 충만한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죽음을 피해서 떠나가면 또 항상 변화하는 삶의 본질을 외면해 버린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삶으로부터도 피해 가게 되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모험을 감행하다


모든 삶은 그 자체에 무수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랑하고 살면 살수록 더욱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일생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위험 중에서 가장 큰 위험은 성장에 따르는 위험이다. 성장이란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것은 한 걸음 살짝 내딛는 것이 아니라 두렵게도 단숨에 도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평생 동안 제대로 성장을 실행해 보지도 못하고 만다. 겉으로 성공한 어른으로 보이지만 대다수의 ‘어른들’이 심리적으로 죽을 때까지 아이로 남아 있다.

저자의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시절 이야기…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의존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뛰어넘기의 사례로 아이가 셋 있는 35살 된 여성이 이혼하고 삶의 주인이 되는 사례와 심장 발작 이후에 우울증에 걸린 52살의 사업가가 어머니와 부인, 자식의 비난까지 감수하며 시골로 내려간 이야기.

아이들이 부모의 기대에 맞게 행동하리라고 생각하는 부모라면, 그들은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파악하여 사랑을 제대로 베풀 수는 없다. 진정한 사랑은 절대적인 자유 선택에 있는 것이지, 남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참고, 신영복 선생의 自由)


사랑은 두터운 책임감과 같은 것


책임감을 가지는 것은 모든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기반이 된다. 책임 의식이 생기지 않는 관계는 부서지기 쉬우며 병적일 우려도 있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면 그 안에 언제나 책임감이 내재해 있다.

책임감과 관련한 정신적 장애

① 성격 장애 : 책임감이 약하며, 장애가 심해질수록 책임지는 능력도 상실한다. 부모가 어린 시절 책임감 있는 행동이란 이런 것이다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책임감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른다.

② 신경과민자 : 책임감의 본질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레이첼이라는 냉랭하고 매우 예의 바른 스물일곱 살의 젊은 부인의 사례 : “네가 나를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버리겠다”는 증세에서 책임감이 충분할 때 치료가 제대로 될 수 있었다.

부모 노릇하는 데 따르는 괴로움을 자기 희생이나 순교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부모가 아이보다 그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변화하는 고통을 이겨 내겠다는 의지가 없고, 성장하는 아이에게서 배울 의사가 없는 부모는 부지불식간에 노망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바로 보도록 일깨우는 힘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한 자세이다.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의 개성과 특징을 알아주고 존중해 준다.

상당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교만한 태도를 가지고 타인을 비판하거나 사실을 깨우치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이라는 안식처(가식적인 겸손 모델)에 숨어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우울과 신경과민 환자의 아버지는 목사였음. 어머니의 폭력적 행동에서 자신을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함)

친구 관계에서 갈등이 전혀 없는 관계는 피상적 관계에 불과할 수 있음. 좋은 친구관계는 적절히 불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말을 잘 듣게 하고 싶으면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을 주려면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전달되도록 맞추어야 한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일한다.


사랑은 훈련되는 것


저자는 자기 훈련의 힘이 사랑에서 나오며 이것은 의지의 한 가지 유형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자기 훈련은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훈련된 행동을 한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 역시 훈련된 관계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내가 참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내 행동을 어떻게 해서든 교정하고 그 사람의 정신적 성장에 최대로 이바지하려고 할 것이다.

지적이고 예술적이며 보헤미안적인 방랑벽을 가진 부부의 사례 : 훈련되지 않는 무질서한 결혼 생활

감정 중에서 분명 훈련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저자가 이미 지적한 대로 이것은 그 자체로서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순간적인 애착이나 정신 집중일 뿐이다. 그러나 정신 집중이 가져다 줄 창조적인 힘을 위해서 이것은 존중되고 길러져야 한다.


사랑은 분리됨에 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하는 행동이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주요 특징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별이 언제나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전적으로 나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지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 준다. 이처럼 상대방과 나와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할 때, 그것은 많은 정신 질환과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독립성을 인지 못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18살 이후 여러 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지난 13년 동안 계속 여러 병원에 입원했던 31살 된 수전의 어머니는 수전이 분리된 독립 개체임을 깨닫지 못하고 수전을 키웠다.

칼릴 지브란의 시 240쪽 (당신은 활이 되어 살아 있는 화살인 당신의 아이들을 미래로 날려 보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을 넘어 부부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배우자가 자신들과 근본적으로 분리된 존재이고 결혼 관계를 떠나서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분리의 문제는 오랜 세월 동안 인류를 괴롭혀 왔다.

개인의 건강이 사회의 건강에 의존해 있듯이 사회의 건강도 그 사회에 속한 개인들의 건강에 의존해 있다.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성장이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으나, 성장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 둘 다 가정에 참여해야 하고, 둘 다 각자의 생에 도전해 나가야 한다.

칼릴 지브란의 시 245쪽 (함께 서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붙어 서지는 마라.)


사랑은 정신 치료와도 같은 것


마르시아의 사례 249

헬렌의 사례 251

정신 치료의 근본적 요소는 사랑이다.

정신 치료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모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정신적인 병은 사랑의 결핍이나 사랑의 결함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정신 치료는 실패하기 쉽고 해롭기까지 하다.


사랑의 신비


<진행 순서>

1. 기억하고 싶은 좋았던 구절이나 공감 가는 부분에 대하여 각자 이야기를 나눕니다.

2. 토론 지점을 잡아서 토론을 합니다.

3.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은 부분에 대하여 제기해 해봅시다.

4. 종합 토론도 진행해 봅니다.

① 공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인지 토론해 봅시다.

사랑의 정의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수많은 사례를 통하여 사랑이 아닌 것(사랑에 빠지는 것, 사랑과 애착, 자기희생, 느낌 등)과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풍부하게 알게 되었다.

② 내용에서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토론해 봅시다.

사랑의 영역이 개인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다. 부모,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에 한정되어 있다. 인류에 대한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의 도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서 살아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물려주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은가. 후자에 대한 부분이 부족하다.

 

 

출처 :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
글쓴이 : 지구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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