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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하고 싶소- 정 태춘

오체투지해무 2008. 10. 23. 16:49

사랑하고 싶소 - 정태춘

詩人의 마을 (1978 서라벌 레코드)

정태춘

No.2 - 사랑하고 싶소

 

1. 시인 (時人)의 마을
2. 사랑하고 싶소
3. 촛불
4. 서해 (西海)에서
5. 그네 (뮤지컬 춘향전에서)
6. 목포 (木浦)의 노래 (여드레 팔십리)
7. 아하! 날개여
8. 겨울 나무
9. 사랑의 보슬비
10. 산 너머 두메

사랑하고 싶소 - 작사 작곡 노래 정태춘

사랑하고 싶소, 예쁜 여자와 말이오
엄청난 내 정열을 쏟아 붓고 싶소
결혼하고 싶소, 착한 여자와 말이오
순진한 내 청춘을 거기 바치고 싶소

내가 살아 있소 내가 살고 있소
크고 작은 고뇌와 희열 속에
멋도 모르고


얘기하고 싶소, 뛰노는 저 애들과 말이오
반짝이는 그 눈망울도 바라보고 싶소
안겨 보고 싶소, 저 푸른 하늘에 말이오
우리 모두의 소망처럼 느껴 보고 싶소

내가 살아 있소 내가 살고 있소
크고 작은 기대와 소망 속에
멋도 모르고


돌아가고 싶소, 내 고향으로 말이오
훌륭한 선친들의 말씀 듣고 싶소
떠나가고 싶소, 먼 타향으로 말이오
내 나라 삼천리 두루 다니고 싶소

내가 살아 있소 내가 살고 있소
크고 작은 애착과 갈망 속에
멋도 모르고

(1977)

 

1970년대 후반 서정적인 포크 송으로 풍요로운 인기를 누리다 돌연 박수 대신 구호가 난무했던 대중집회에서 민중가수로 돌변했던 정태춘.

그는 꺼져가던 한국 포크에 회생의 불꽃을 댕기는 대중음악가로 돌아와 쉼 없는 음악적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스스로 내팽개쳤던 ‘사랑하는 고향’을 그린 젊은 날의 서정성과 더불어 세상의 아픈 현실을 껴안은 농익은 밀주처럼 무르익은 가락과 노랫말로 그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신랄한 풍자와 비판으로만 일관했던 변혁지향의 노래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음악적 화해를 통해 발전된 포크 형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군사정권의 ‘긴급조치 9호’ 이후 가요계의 암흑기였던 1978년 낭만적인 데뷔앨범 ‘시인의 마을’로 대중들과 첫 대면을 한 정태춘.
그는 대학 출신이 주도했던 포크나 대학가요제와는 무관했지만 대중적인 유행가수와도 어울리지 않은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초기 노래들은 유신정권에 의해 의도적으로 주도된 사랑 타령조의 감각적인 노래들과는 달리 구수한 고향의 향내를 풍기는 전원적 삶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사회 풍자적인 포크 송은 아니었지만 대중들은 사색적이고 토속적인 그의 노랫말과 서정적인 가락에 잠시 잊고 지냈던 억눌린 현실세계를 인식하며 진지한 삶의 향수를 기억했다.

그러나 데뷔시절의 그는 저항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포크가수는 결코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촌스럽고 따분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는 1979년 문화방송에서 신인 가수상을 수상한 인기 가수였다.

체질적으로 연예인의 ‘끼’ 보다는 예술혼이 꿈틀거렸던 기질은 인기보다는 포크와 국악을 접목하는 음악적 실험에 더욱 행복감을 느꼈다. 하지만 진지한 음악은 세상사에 고달픈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다. 그의 변화는 소수만이 주목했을 뿐 생활조차 버겁게 추락했다.

세상살이가 힘들어지자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민중가수로의 변신은 운명적일지도 모른다. 전교조 교사들을 위한 공연으로 시작되어 음반사전심의제도 철폐를 위해 거리에서 혈혈단신으로 비합법 음반발매 투쟁을 벌인 그는 외형적인 풍성함으로만 치닫는 천박한 가요계에 기름진 자양분을 제공했다.

정태춘은 1954년 3월 농사가 주업인 평범한 가정의 5남 3녀 중 일곱 째로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그가 뛰어 놀았던 평택의 끝 마을 ‘도두리’는 끝없이 넓은 평야지역과 들꽃이 만발한 들판,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 그곳을 오가던 새우젓 뱃소리가 정겨웠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평택 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구해와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가지고 놀았다. 악보를 몰라도 한번 들은 노래는 곧바로 연주를 할 만큼 타고난 음악성은 주목을 받았다.

평택 중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음악성을 눈여겨보았던 넷째 형의 권유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형 집에서 클래식음반을 들으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평택고 2학년 때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이 되면서 공부는 뒷전이고 담배를 몰래 피우는 등 동네 음악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음대 진학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정태춘은 이 시기에 접한 팝송과 1970년대 초반 김민기를 포함한 포크 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성에 낀 버스 창문에다 시조 등을 즉흥적으로 지어 쓰는 등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할 만한 실력은 없었다.

1972년 서울대 음대에서 정식 레슨을 받으며 재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부보다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는 등 사춘기의 열병으로 방황했다.

말도 없이 가출해 밀양의 목욕탕 보일러 화부로 일하다 셋째 형에 이끌려 고향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로 한동안 소일했다. 하지만 가시지 않은 열병은 삭발을 하거나 목포, 울릉도, 제주도로 가출을 강요했다.

그의 초기 곡들은 대학생에게 늘 위축감을 가지고 방황하던 이 시기에 대부분 쓰여진 곡들이다. 고향 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일기나 시처럼 쉽게 노래를 만들 때 그는 유일하게 행복을 느꼈다.

1975년 입대 후 인천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 타격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타도 없이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등 많은 곡들을 쓰며 허무감에 방황하는 마음들을 달랬다.

1978년 제대 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작 곡으로 데뷔음반을 준비하던 중 신인가수 박은옥과 운명적인 만남과 결혼으로 음악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데뷔음반부터 가해진 ‘공륜의 심의보류 조치’는 정태춘의 창작욕을 옥죄며 숨구멍을 막아왔다. 노래 ‘시인의 마을’중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라는 대목이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에 탈락되자 음반사는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바꾸어 겨우 심의를 통과시켰다.
이후 1988년 6집 ‘무진 새 노래’를 낼 때까지 전면 개작지시 10곡, 부분 개작 지시를 20여 곡이나 받으며 그는 숨을 헐떡거렸다.

대중 취향의 달콤한 곡들만이 선곡된 데뷔음반 ‘시인의 마을 (서라벌 ,SR0125,1978년11월5일)' 은 빅히트를 했다. 수록곡 ‘촛불’등의 히트 퍼레이드로 달궈진 뜨거운 호응은 단번에 인기가수로 떠오르게 했다.

또한 신인가수 박은옥과의 꿈같은 연애는 정태춘에게 인생의 달콤함을 만끽하게 했다.
1집의 성공으로 음반사는 2집의 곡 선정을 가수에게 아예 맡겨 버렸다. 그러나 음악보다는 적응키 힘든 ‘명랑운동회’등 오락프로 출연을 강요하는 인기 가수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정태춘은 자기 색깔의 음악 찾기에 집착하며 주류가요계에 차츰 거리를 두었다.
그 결과물이 상업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2집 ‘사랑과 인생과 영원의 시-서라벌, SR0183,1980년 1월30일’과 국악과 양악의 음악적 상관관계에 대한 실험을 꾀한 3집 ‘정태춘-대성, DAS0022, 1982년3월20일’이었다.

명반으로 손꼽히는 이 음반들은 ‘촛불’류의 달콤한 제2의 노래를 기대했던 대중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음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1980년 5월 결혼한 정태춘에겐 경제적 파산이라는 불청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부가 함께 지구레코드사와 4년 간 전속에 800만원이라는 굴욕적인 계약을 맺으며 발표한 1985년 5번째의 앨범 ‘북한강에서’는 ‘자연 속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사색적인 노래’로 주목받으며 다시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때부터 역동적인 민요적 선율과 창법을 선보였다.

이후 1987년까지 3년 동안 전국의 소극장을 순회하는 라이브 콘서트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 마당’으로 음악적 변화를 꾀했다. 자신의 음악적, 사회적 고민들을 대중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면서 정태춘은 6번째 앨범 ‘무진 새 노래-1988년’으로 확연하게 변화된 음악세계를 공개했다.

수록곡 ‘고향집 가세’에서 보여주듯 ‘몸은 떠나와도 마음은 떠나지 못했던 과거의 고향에서 벗어나 비록 퇴락하고 노인들만 남은 고향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현재적 시점의 고향’을 묘사하는 인식의 전환을 보였다.

1987년 겨울 서울 청계피복 노조의 작은 집회에서 시작된 현장운동 이후 그는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라는 전국 순회공연에서 20여 개의 북으로 춤과 반주를 같이 함으로써 신명성과 집단성까지 터득한다.

1989년 전국 각 대학 총학생회와 결합한 전교조 지지 공연은 20만 명이 넘는 민중들과 호흡한 대형 야외 공연이었다. 이때 그는 사회현실과 음악이 갖는 힘에 새롭게 눈떴다. 정태춘은 모든 것을 혼자 몸으로 부딪히고 습득해나가며 문제의식을 단련했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이 더 이상 제도권의 심의를 통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질식할 것 같았다.

1990년 마침내 사전심의 철폐운동이라는 정면대결로 들어간다. 비합법 음반인 1990년 ‘아! 대한민국’과 1993년의 ‘92장마 종로에서’는 제도권에 대항하는 적극적 행동이었다. 그는 공륜의 심의를 거부한 불법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하여 대학가나 집회현장에서 판매하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정태춘은 “가요사상 첫 사전심의 거부였는데도 1989년 이후 해금 분위기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정부의 간섭이 별로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직설적인 사회비판을 담았던 1990년 음반과는 달리 서정성이 짙은 1993년의 두 번째 비합법 음반은 사정이 달랐다. 각 시도 경찰서로 ‘음반회수’ 공문이 나돌자 새마을체육관 등 공공성격이 짙은 곳은 여지없이 판매저지가 이어졌다.

1993년 말 문화부의 고발로 불구속 기소가 되자 정태춘은 위헌법률심판 신청을 냈고 1996년 마침내 음반의 사전심의폐지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또한 3가지 버전의 LP 재킷으로 발표된 ‘92 장마, 종로에서’ 음반은 가요음반 콜렉터들의 군침을 흘리게 하는 희귀 음반으로 대접 받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음악을 통해 발언하는 실천적인 대중예술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정태춘. 19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무기력에 빠질 때 그는 희망의 노래들로 자신이 한국포크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보여주었다.

* 글 :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

출처 : 전원주택을만드는사람들
글쓴이 : 시인의 마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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