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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위의 꿈을 들으며-인권의 의미를 묻다

오체투지해무 2008. 4. 19. 10:08



손문상_사회적유전_인권만화

 

어제 저녁 추적 60분을 보았습니다.

한경선이란 어느 강의 전담 교수의 자살을 테마로

이 땅에 수많은 시간강사와 엘리트급 박사들이 학교란 기관의 폭력에

어떻게 노출되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교수추천제의 허구와 학교기관의 정치적 로비까지 다루었더군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제로인 사회

개인에 대한 사랑은 원래 본인으로 부터 시작하지만

그 사랑의 방식은 나를 둘러싼 타자를 향해 갈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없이 사회가 지속적인 유지 가능성을 확보하기란 턱없이 어려운 일이지요.

 

손문상의 인권만화를 보다보면 약간 쓸쓸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학력이 자본이 되는 사회, 물론 구별짓기와 차별화를 위한 가장

원초적인 자본의 형태입니다만, 그 도가 너무 지나친 사회가 되었더군요.



박재동_집값_인권만화

 

장애인의 날만 되면 인터뷰가 뜹니다. 장애인을 장애우라 부르며

친구가 되자고, 사회가 배려를 했으면 좋겠다 어떤다.....인터뷰 속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여전히 한국사회는 살만 하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만

실제의 현실하곤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지요. 자신의 집값 상승 이외에는 그 어떤 가치도

그 어떤 철학도 없는 한국사회에선, 장애인 시설이 자신의 집값에 미칠

영향만을 고려할 뿐이더군요.

 



이상훈_변화를 위한 꽃병- '不'동산에서 꽃'동산으로
석기_18×18×4.5cm_2006

 

 

집값과 아파트 재건축, 부동산이 삶의 바이블이 되는 세상입니다.

마음 속에 작은 꽃 동산 하나 가지런히 키우고

싶은 요즘입니다. 부동산이 모여라 꽃동산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성남훈_엄마, 저어 오네에

2005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열명의 사진작가들이 찍은

포토 에세이 전에 간적이 있습니다. 국가 인권 위원회가 후원한 전시였습니다

우리 사회 차별의 현장 깊숙히 다가가 도시의 뒷골목과 집회현장, 농촌, 어촌, 산간벽지 할 것 없이

전국을 떠돌며 봄부터 초겨울까지 무심한 카메라에 숨결을 불어넣어 갔습니다.

 

보호시설의 정신장애인, 난민, 중국 동포, 장애인과 그 가족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인들과 어린이만 남은 농촌, 한국으로 시집온 아시아의 여성들, 산간벽지의 여성들,

조손 가정의 어린이 등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차별들이 존재합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구별짓기를 시도하는 우리들. 그 속에는 차별이 아닌 차이에 근거한

새로운 희망의 힘을 찾아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존재합니다.


강원도 정선의 한 초등학교 분교에 다니는 아람이는 할머니와 함께 삽니다.

 엄마아빠가 제 아이들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겨놓은 조손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정선의 아람이는 충청도에도 전라도에도 경상도에도 있습니다.

요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화된 풍경이지요.




김문호_기대어 선 가족들


지금 장애인들과 그 가족은 서로만을 의지할 뿐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정책을 기대하기엔 먼 현실이지요

현 정권 들어와서 민영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은 이런 장애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적 재량권과 자본까지도 빼앗고 있으니까요.

 

장애의 구분 없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생활공동체는

장애인과 이 사회가 서로 기대어 설 때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쉴 휴(休)란 인간이 나무에 기대어 서는 형태를 따 만든 글자이지요.

우리시대에 진정한 쉼이란 바로 숲(林)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마주보며

기대어 서서 쉬어야 합니다.




김중만_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내일이다


1년 단위로 계약된 삶. 한해살이 들풀이었으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인간의 삶은 한해살이가 아닙니다.

마음대로 파견하고 거두어들일 수도 없는 것이죠. 수백만의 비정규직,

계약과 파견과 임시로 이루어진 삶으로 채워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재벌들은

경쟁과 노동자본의 유연한 이동이란 그럴듯한 표현을 사용합니다만, 사실 그들의 주장은

1920년대 기계 공장 공간에서 수십시간씩 노동을 착취하던 시절에 만든 주장의 재판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제 보았던 한경선 교수의 죽음은, 이 땅에서 비정규직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그 비애감의 크기가 어떤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상처가 개인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갖은 사학비리와 연계되어 창출하는

지금 대학의 부조리로 연결됩니다. 재단 이사장의 며느리는 쉽게 교수가 되지만

체육 교육을 학부에서 전공한 학자는 영어교육학 교수가 되기 어렵나 봅니다.




노익상_촌 여자의 굽이굽이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거의 떠난 어촌의 텅 빈 마을은 홀로 아니면

두 집만이 살림을 꾸리고 있디료. 평생을 한 곳에 머물러 살아왔던 터라

다른 고을 이주는 곧 삶을 포기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말이 예뻐 재개발이고

뉴타운이지, 습한 구석에서 살아간 이들에게는 그저 곱게 말할때 나가라는 말 밖엔 안되는 것이죠.

 

태안지역 어민들에 대한 배려는 이미 잊혀져 가는 것 같습니다.

하긴 어느 언론도 이 문제를 다루지 않더군요.

삼성중공업의 피해보상 문제도, 실제로 이 문제를 야기한 어느쪽의 사과도

제대로 없이 유야무야 사라지고 있습니다.




박여선_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던진 질문 

 비정규직 노동자가 한 공장 안에서 정규직과 함께 일합니다
정규직의 1/3에 육박하는 숫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들이 하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도급업체 노동자, 2차 하청 노동자인 비정규직들도 정규직과 똑같이 인격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입니다.
대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릅니다. 작업복과 쉬는 곳도 다르고 월급봉투의 무게도 다르지요.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노동의 유연한 축적이란 화두가
미안하게도, 고객을 지향하는 현대 기업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업은 고객을 응대하는 내부 고객을 어떻게 관리하는 가의
문제도 생각해야 하지요.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입니다.
이건 경영학도이자 사업가인 제 생각입니다.
 
추적 60분 인터뷰에서 모 대학 교무처장이란 자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교원지위에 관해 질문을 던지니 "검증이 안된 사람들에게 철밥통"을 줄수는 없다
하더라구요. 요즘 번역을 하나 하고 있는데 자칭 함께 공역이랍시고 낀 교수들의
번역실력을 보니 '검증' 운운하는 그 교무처장의 말이 그냥 좀 우습더군요.
 
세월을 견딘 인간만이 꽃을 피운다고 하지만
견디기 어려운 환경만을 양산하는 우리사회의 단면들이
"사람만이 희망"인 세상을 꿈꾸게 하기엔 참 어려움을 보여주네요.
그래도 어떻게요. 힘 내야지!
 
아차....글 쓰다 보니 떠오른 생각인데 300억 전 재산과 월급
환원 운운하던 대통령의 공약은 지금 어디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요?
아시는 분좀 알려주세요.
 
인순이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거위의 꿈....전 그녀가 출연한 CF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혼혈....두 인종의 장점이 합쳐진 사람.
 
 
출처 :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
글쓴이 : 김홍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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