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의 원래 명칭은 경성역(京城驛)이다. 한국의 철도 역사는 경인선(京仁線)에서 시작된다. 경인선은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의해 1899년 4월 착공되어 같은 해 9월 18일에 인천~노량진 33.2km 구간을 개통하였다. 이어 1900년 8월 8일 한강철교(漢江鐵橋)가 개통되면서, 같은 해 서울 남대문역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1900년 겨우 10평짜리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대충 짓고 ‘남대문정거장(南大門停車場)’이라 불렀다. 이것이 경성역의 시초이며, 이 역사는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다.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8월 경원선 개통으로, 경성은 한국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920년 경성 인구가 30만명으로 늘어나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경성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새 역사(驛舍)가 필요하게 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용산에 주둔한 조선군사령부를 위하여 용산정거장을 1906년 11월에 건립하였다. 군용 목적의 용산정거장에 신 역사를 설치할 수 없게 되어, 자연스럽게 남대문정거장 일대가 경성역의 부지로 결정되었다. 이 역사의 설립 주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약칭 滿鐵)이었다. 만철은 경성역이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국제적인 수준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일본 도쿄(東京)~시모노세끼(下關) 사이는 국철, 시모노세끼~부산 사이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부산~봉천(奉天) 혹은 북경(北京) 사이는 직통 열차로 연결되며, 이 열차는 하르빈을 거쳐 시베리아철도로 연결되어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연결시키는 구상을 가졌다. 이러한 세계적인 교통망에서 경성역은 “한반도의 현관이며, 식민지 경영의 관문” 역할이 부여되었다. 설계자는 도쿄대학(東京大學) 교수이던 쯔카모토 야스시(塚本靖)였다. 그는 다쯔노 깅고(辰野金吾)의 제자였는데, 다쯔노 깅고는 도쿄역사(東京驛舍)를 설계한 바 있었다. 역사의 신축 추진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공무과 건축계에서 담당하였다. 경성역은 1922년 6월 착공되어 1925년 9월에 준공되었다. 원래는 1923년에 준공 예정이었으나,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으로 공기(工期)가 연장되고, 공사비도 일부 감액되었다고 한다. 건축 규모는 대지 면적 70,083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6,631㎡(2,006평)의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제1역은 도쿄역, 동양 제2역은 경성역”으로 간주할 정도로 경성역은 일본 도쿄역과 비견되는 규모였다. 이 건물 1층은 대합실, 2층은 귀빈실과 식당(그릴), 그리고 지하는 역무실로 사용되었다. 승강장은 지하에서 연결되었다. 1층 대합실 중앙에는 큰 홀이 있고, 그 상부 지붕에는 비잔틴풍의 돔(dome)을 올렸다. 그 돔의 측면 반원형 아치 창으로부터 중앙홀 내부로 자연 광선을 끌어들여 밝은 홀 공간을 조성하였다. 철근콘크리트조에 벽돌조로 마감했으며, 입면상 중요 부분에 돌을 사용하였다. 1층부는 거친돌 마감식으로 처리하고, 상부 모서리와 개구부에는 돌을 사용하였다. 지붕은 철골조에 천연슬레이트 마감이며, 일부 동판 이음을 하였다. 이 건물은 거대한 규모, 풍부한 장식과 정교한 상세(details)로,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일제가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건립한 대표적인 건축이다. 그리고 역사 그릴은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을 논하고, 많은 작품을 창작한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경성역은 1946년 서울역으로 개명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수리 과정에서 중앙홀 천창(天窓)이 훼손되었다. 1958년 1월 기존 역사 남측에 새마을호 대합실이 증축되었다. 1988년 역사 현대화와 여객 편의 제공을 위하여 ‘서울역 선상대합실 공사’가 1988년 준공되어, 역사의 주 기능인 대합실 공간은 이 선상역사(船上驛舍)로 이관되었다. |